한훈 선생과 김상옥 의사

올해로 순국 100주년을 맞은 김상옥 의사와 10대 시절 만나 항일의지를 드높이며 형제애를 나누면서 함께 무력항쟁에 헌신했던 독립투사 한훈 선생(1889∼1950)을 기리는 한훈 기념관이 충남 계룡시 신도안 계룡대 초입에 2021년 문을 열었다. 길지 않은 기간 두터운 우정을 맺어온 두 분은 장차 사돈이 되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33세 이른 나이에 순국한 김상옥 의사의 아들(후손이 없어 양자 입적)과 한훈 선생의 따님이 결혼하여 두 분은 사돈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열혈 애국투사 사이에 사돈관계가 이루어진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 찾기 어려운 데 두 분의 우정과 드높은 애국심이 양가간 혼인으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훈 선생은 1906년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했으니 열일곱 소년이었다. 홍주의병은 향후 선생이 전개할 의열투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듬해 배영직, 양기하 선생 등과 함께 신도안에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척결을 준비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룡대 2정문 진입로 무궁화동산에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이 2007년 건립된 바 있다.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해 1907년을 상징하여 기념탑 높이를 1907㎝로 만들었다고 한다.
1913년 경북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고 그 후 대한광복회로 확대해 일본 헌병 분견대를 기습, 여러 명을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1920년 미국의회 의원단 방문을 계기로 조선총독을 처단, 세계여론을 환기시키려 결사대를 조직, 김상옥 의사등과 합류하여 모의 하던 중 밀고로 거사 하루 전 붙잡혀 8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의병사건 가담이 드러나 형이 10년 가중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가 다시 투옥, 여러 지역 감옥으로 이감 수용되었다. 독방에 투옥되어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고 부인 유응도 여사가 만들어 들여보낸 주먹밥으로 요기를 하였다고 한다. 장기간 고문, 학대 등 옥고로 중병을 얻어 출옥한 뒤 계룡에 은거하며 서당을 개설하고 조국광복의 염원을 드높였다.
광복 후 광복단을 재건하고 신도지부를 조직, 일제 잔재 척결에 매진하였고 신탁통치 반대운동, 순국선열 추도회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6·25로 북한군에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던 중 피살, 61년의 파란만장한 애국애족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선생의 독립활동 생애에 경의를 표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지조를 지키고 의로운 죽음으로 산화한 분들을 우리는 열사(烈士)로 기억한다. 의사(義士)는 나라를 위하여 무력행동으로 항거하고 목숨을 잃은 애국선열이고 지사(志士)의 경우 나라를 위하여 드높은 뜻으로 헌신한 분들을 지칭한다. 국가보훈부에서는 이분들을 모두 ‘독립유공자’로 통칭하고 있다. 한훈 선생은 열사, 의사 그리고 지사의 여러 면모를 모두 적극적으로 실천한 분으로 어느 한 가지 이름만으로는 미흡해 보인다. 그래서 이를 포괄하여 ‘독립유공자 한훈 선생’으로 부르면 좋을듯 싶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