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채현 씨 제공

의무교육을 받은 청년이 사회로 나오면 무지한 게 보통이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한 뒤 진로를 정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청년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청년은 그저 주입식교육을 통해 시험을 잘 보는 법만을 배웠을 뿐, 사회로 나가서 어떻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태반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빠르게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장 든든한 우군인 부모가 진로를 반대한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대전청년주간에서 아나운서를 맡은 오채현(27·여)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답이 있다.

◆충분했던 끼… 치어리더의 길로

살면서 아르바이트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오 씨 역시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용돈도 벌고 부모님 부담을 덜어 드릴 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아르바이트는 바로 키즈 카페.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에 그는 키즈 카페에서 단숨에 에이스로 떠올랐다. 여기에 어렸을 적 가야금을 전공한 탓에 가무까지 훌륭해 키즈 카페에서 볼 땐 그야말로 맞춤형 인재였다. 끼가 워낙 많았던 탓에 그는 키즈 카페를 방문했던 한 회사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치어리더를 육성하는 회사였고 그는 긍정적으로 고민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는 심했다.

어렸을 적 국악을 할 땐 그대로 쭉 전공을 살리길 바랐고 이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풍파가 많은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 씨는 화끈하게 바로 ‘OK’를 하고 KBL에서 울산을 연고로 하는 현대모비스 피버스에 입단하게 됐다. 경기가 있는 날엔 대전과 울산을 오갔고 그렇지 않은 날엔 별도 연습실에 모여 밤 10시까지 땀을 흘렸다. 매일이 고된 날이었지만 늘 즐거웠고 오 씨는 얼굴을 슬슬 알리며 KBO에서 SSG랜더스의 전신인 SK와이번스, K리그의 서울 이랜드FC, KOVO의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 경기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 등에서 활동, 인지도를 넓혀갔다.

“울산 모비스에서 팀이 우승을 차지했고 뒤이어 와이번스로 옮긴 첫해와 마지막 해에 우승했는데 정말 기뻤어요. 팀이 이길 때도, 질 때도 치어리더는 항상 웃으면서 응원하는 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줘야 하잖아요. 그 매력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 치어리더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쑥 찾아온 은퇴… 제2의 삶 시작

너무나 즐거운 생활이었지만 오 씨는 치어리더 일을 그만둬야 했다.

장시간의 연습, 홈과 원정을 오가는 강행군, 여기에 휴학 만료까지. 복학하고 계속해서 팀원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으나 학업에도 매진해야 했던 탓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고 모여서 1시간에 끝날 게 따로 연습하다 보니 3~4시간 이상을 쏟아야 했다. 여기에 허리디스크까지 생기며 더 이상의 활동은 어려웠다.

그러나 치어리더를 하면서 관중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던 그는 기존 건축학과 대신 공연예술과로 전과하기로 마음먹었다. 치어리더 당시 그렇게 반대의 뜻을 내비쳤던 부모님은 공연예술과로 전과하는 오 씨를 보고 이젠 미안한 마음마저 갖고 있다고. 이렇게 원하는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반대하지 말걸이라고. 한편으론 아직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새끼가 금세 원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에 시름을 놓았단다.

“건강 등의 문제로 치어리더를 그만두고 공연예술과로 전과하고 나선 부모님이 정말 미안해하셨어요. 그래도 잔소리 안 하고 지켜봐 주신 걸로도 너무 감사하죠. 예전에 치어리더 때 느꼈던 감정을 살려서 아나운서 같은 일에 도전하려고요.”

◆“청년이 늘 도전할 수 있도록”

오 씨가 아나운서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 치어리더 시절의 감정도 있지만 전과한 뒤 미디어 스피치란 강연을 들었을 때다.

말을 통해 누군가에게 감정을 전달한다는 게 동작으로 관중과 소통하는 치어리더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전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제대로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예전처럼 남들보다 배로 열심히 하는 것뿐. 학교가 끝나면 늘 담당 교수인 김설 교수의 도움을 받아 발성부터 표정 등 다양한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우연히 대전시의 청년주간에서 아나운서를 뽑는다는 소식을 접해 들었고 김 교수와 함께 사흘밤낮 연습에 몰두했다. 약 4년 동안의 강행군도 버틴 그였기에 연습은 늘 즐거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지만 결국 일신의 이유로 그만뒀는데 다시 찾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까지 더해졌다.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아요. 저도 우연히 시작한 치어리더 생활이 제 인생의 이정표가 됐어요. 그러니까 청년이 많은 걸 경험할 수 있게 해야 돼요. 지금은 충분히 청년을 위한 정책이 많으니 그걸 청년에게 많이 알려야죠. 언제든 도전할 수 있도록요.”

이제 막 아나운서의 길로 들어든 오 씨는 남들보다 늦은 출발선에 섰다. 일찌감치 준비한 다른 사람은 벌써 트랙을 뛰기 시작했지만 지지대를 밟고 뛰기 시작했지만 그에겐 걱정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해 결과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이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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