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손배책임 제한, 사용자 범위 확대 골자
與 필리버스터 포기. 野 단독으로 표결 진행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 시 논의 또 표류

“회사가 해도 너무한다. 해고 18명, 징계 90명, 재산·급여가압류…,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 고용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 6개월 이상 급여 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내게 들어오는 돈은 없을 것이다.” 2002년 파업을 이유로 65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노조원 임금과 재산을 가압류한 두산중공업에서 일했던 고(故) 배달호 씨는 이런 말을 남긴 채 2003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2009년 쌍용차 파업과 관련해 노조에 청구된 손배소 폭탄은 47억 원이다. 이 사건을 대법원이 파기환송하는 데 13년이 걸렸다. 그 사이 30여 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이 죽어갔다. 2003년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해고와 관련, 원청 대표가 부당해고의 책임이 있는 진짜 사장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는 데 7년이 걸렸다. 법원 판결에도 현대중공업은 교섭에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2022년, 대우조선해양은 금속노조를 대상으로 47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9·20대 국회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법안이 노동계의 분노 속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노조법 2조와 3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노조법) 개정안은 사용자의 범위를 확장하고 노동쟁의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청구 제한 요건을 명확하게 한 게 골자다.
현행 노조법 2조는 노조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를 담고 있는데 사용자는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 또는 그 사업의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해 사업주를 위해 행동하는 자’라고 규정돼 있다. 개정안엔 ‘근로계약 체결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그 범위에 있어서는 사용자로 본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최근 법원의 판례를 따른 것으로 사용자의 범위를 ‘원청업체’로 넓혀 하청 등 간접고용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가 실질적인 단체교섭을 통해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한 거다. 노동계 관계자는 “과로로 죽어간 동료만 수십명, 참대 못해 하청 사장을 찾아가면 힘이 없다고 하고 원청 사장을 찾아가면 교섭 의무가 없다고 외면한다. 우리는 진짜 사장과의 교섭을 원한다. 그래야 실질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노동쟁의 행위의 범위도 확대된다. 현재는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만 쟁의행위의 대상이 되는데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정리해고, 단체협약 위반, 임금체불 등에 따른 쟁의행위도 가능해진다. 쌍용차 파업의 경우 ‘정리해고 반대’가 목적이었던 만큼 시작부터 불법으로 규정돼 더 큰 사회적 비극을 초래했다.
현행 노조법 3조는 손해배상 청구의 제한 사항을 담고 있다.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경우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해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돼 있다. 개정안은 법원이 조합원 등의 쟁의행위 등으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경우 그 손해에 대해 각 배상의무자별로 각각의 귀책 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하도록 하는 한편 쟁의행위 등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신원보증인의 배상책임을 면제하도록 했다. 사측의 손배소 제기가 더 이상 쟁의행위 참가 근로자를 상대로 한 보복 조치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자는 희망이 담겨있다.
◆법안 국회 통과했지만…
법안처리가 1년 넘게 지연되자 노동계는 “이보다 더 절박한 민생법안은 없다”며 시급한 법안 처리를 촉구했고 경제단체들은 “노사관계가 파탄나고 산업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며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은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고 더 이상 윤석열정권의 노조탄압을 좌시할 수 없다며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낸 반면 여당인 국민의힘은 “노조 청부입법”이라며 반대했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법안 논의는 이 같은 첨예한 대립 속에서 평행선을 달렸지만 결국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경총·대한상의·한국무역협회·한국경제인협회·중소기업중앙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6단체는 전날 공동성명을 통해 “노조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산업현장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지고 더 이상 우리 기업들은 정상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없다. 하청노동자가 원청을 상대로 끊임없이 쟁의행위를 하면 원-하청 간 산업생태계는 붕괴된다. 노동쟁의의 범위가 확대되고 손해배상책임이 제한되면 산업현장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지금도 산업현장은 강성노조의 폭력과 파괴, 사업장 점거, 출입방해 등 불법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개정안이 시행되면 부당해고, 해고자 복직과 같이 사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물론 기업의 투자결정, 사업장 이전 등 사용자의 경영상 판단까지 쟁의행의 대상이 된다.
노조가 불법행위를 해도 사실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돼 산업현장은 1년 내내 노사분규와 불법행위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며 반대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국민의힘이 9일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초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끝까지 버틸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 보고되자 이 위원장을 지키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포기한 거다.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끝난 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발동하면 논의는 더 표류할 수밖에 없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