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빈 시내에서 D번 트램을 타고 외곽인 벨베데레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벨베데레 궁(Belvedere)이다. 1697년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군사령관 프란츠 오이겐(Franz Eugen von Savoyen–Carignan: 1663~1736) 공작은 빈 시내와 떨어진 초지와 농지뿐이던 이 이곳을 매입하고, 1717년 건축가 힐데브란트(Hildebrandt)에게 주거용으로 벨베데레 하궁(Unteres Belvedere)을 짓게 했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튀르크 전쟁 때 총사령관으로서 큰 공을 세우고,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헝가리 왕국을 통째로 넘겨주었다. 1723년에는 오이겐 공작은 파리 베르사유궁 정원을 만든 도미니크 지라르(Dominique Girard)에게 하궁 뒤편에 넓은 연못과 정원을 만들고, 상궁(Oberes Belvedere)을 짓게 했다. 상궁은 ‘정원 궁전’ 즉, 카르텐 필레(Gartenpalais)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로써 오이겐 공작의 위상과 포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736년 오이겐 공작이 자식도 없이 갑자기 죽자, 벨베데레 궁은 조카딸 빅토리아가 상속되었다. 빅토리아는 이곳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처분했다. 이때 매매증명에서 처음으로 ‘벨베데레 궁전’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벨베데레란 ‘좋은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란 이탈리아어로 궁전이나 주택의 위층 또는 정원의 높은 곳에 전망용으로 만든 일종의 옥상 노대(露臺)를 의미한다.(자세히는 2023. 2. 15. 바티칸 박물관 참조)



이후 벨베데레 궁은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이 되었다. 1776년 테레지아 여제는 아들 요제프 3세가 거주하던 호프부르크 궁에 있던 미술품과 귀중품을 이곳으로 옮겨서 벨베데레 궁은 미술관으로 자리 잡는 토대가 되었다가 1차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벨베데르 궁은 완전히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하궁은 중세에서 바로크 시대까지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화려한 바로크식 상궁은 19~ 20세기 근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벨베데레 궁은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크게 훼손됐다가 복구하여 1955년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또, 상궁에서는 1955년 5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 외무부 장관이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장소로 유명한데, 벨베데레 궁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벨베데레 궁의 입장료는 하궁 입장료가 성인 11유로, 학생 8.5유로이고, 상궁은 성인 14유로, 학생은 11.5유로이다. 상하궁 통합 입장권인 벨베데르 티켓은 성인 19유로, 학생 16.5유로이지만, 18세 미만은 무료입장할 수 있다. 항상 강조하는 말이지만, 외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관람할 때 언어의 불편과 창구의 혼잡, 대기시간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국내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벨베데레 궁의 정원은 자연 상태로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영국식 정원과 달리 프랑스 베르사유궁의 정원을 모방하여 방사선 혹은 원형 등 다양한 모양으로 배치하고 수목을 심었다. 빈의 쉔브룬 궁, 호프부르크 궁, 벨베데레 궁의 설계와 정원 등을 통해서 우리는 합스부르크가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의 문화와 예술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벨베데레 궁 입구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스핑크스(Sphinx) 조각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그리스신화에서 스핑크스는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몸통은 사자이고 독수리 날개가 달린 것으로 묘사되는 괴물로서 ‘지혜가 샘 솟는 원천’이라는 의미가 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아래로 길게 펼쳐진 벨베데레 궁의 뒤로는 빈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고, 성 슈테판 성당의 첨탑도 보인다.






중세에서 바로크 시대까지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하궁에서는 유럽을 정복한 프랑스 나폴레옹의 기마상이 가장 눈에 띄고, 근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상궁에서는 오스트리아 출신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이 가장 인기다.
1862년 금속세공업자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금속세공 일을 도운 영향을 받아서 그의 작품에 금은 등 금속을 많이 사용했다. 클림트의 ‘키스 (Der Kuss)’에도 금속을 도료에 넣고 그렸다고 하며, 두 연인이 껴안고 키스하는 모습에서 남자 옷에는 모두 네모난 모형을 그렸고, 여자 옷에는 둥근 무늬를 그렸다. 여자는 손과 발만 보이고, 옷과 다른 부분은 아름다운 색채로 도금된 모습이어서 사랑의 환상을 느끼게 한다. 금융업자이자 설탕 제조업자인 유대인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의 후원자였는데, 그는 클림트에게 자기 부인 아델로 브로흐 바우어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클림트가 1899년 아델레가 초상화를 그릴 당시 클림트는 37세, 아델레는 18세였으며, 아델레는 클림트를 위해서 관능적인 모델이 되어 주어 몇 장의 초상화를 그렸다. ‘현대판 모나리자’라는 별명이 붙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 1’은 180㎝의 정사각형 약 1평 정도의 틀 속에 전시되어 있다. 클림트는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렸으나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2차 대전 때인 1945년 죽었다. 그러나 그 후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는 생전에 마리아 짐머맨이 낳은 두 아들만을 자기 자식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1908년 미술관의 대표 그림으로 되었으나, 2000년 클림트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이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2006년 그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현대판 모나리자는 미국의 사업가 로널드 로더에게 1억 3천5백만 달러에 매각되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가격의 그림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상궁에는 클림트 이외에 오스트리아가 낳은 또 다른 대표 화가인 에곤 실레(Egon Schiele : 1890~1918)의 작품과 반 고흐의 작품도 있다. 하궁 옆에 있는 오랑게리는 아열대 식물을 보관하던 식물원인데, 최근 오스트리아의 중세 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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