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다. 낸시 벤뱅가가 쓰고 문종원이 옮긴 ‘학대받는 아이에서 학대하는 어른으로’라는 책이다. 책은 잘 팔리지 않으면 얼마 못 가 품절되거나 절판된다. 좋은 책인데도 구하려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폭력의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널리 퍼져 있다. 책 제목대로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나중에 커서 학대하는 어른이 된다고 한다. 그럴 확률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일곱 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을 구입하게 된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이 책을 닥터 빈티지라는 중고서점에서 샀다. 배송조회를 해보니 판매자는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었다. 주문 이틀 후 책이 왔다. 150쪽 정도 되는 얄폿한 책이었다. 앞표지를 넘겼다. 속표지 안에 천 원짜리 한 장이 꽂혀 있고, 메모지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정성스럽게 씌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매 감사드리며,
주문하신 도서 살펴보던 중 약간의
밑줄이 발견되었습니다.
주문 취소하여야 하나 1000원 동봉해서
일단 보내드리니 상품 수령 후 환불을
원하시면 연락주세요.
등록 시 꼼꼼하게 확인 못해 죄송합니다~.

책정가는 6000원, 중고가는 2200원. 택배비 2000원을 더해 내가 산 가격은 4200원이었다. 본문에 밑줄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해 천 원을 환불하니, 주문을 취소하려면 연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천 원짜리 지폐를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냄새도 맡아보았다. 우리 주변에 흔하고 흔한 게 천 원짜리였지만, 이 지폐는 수 천 년 지나 발굴된 고대의 화폐인 양 귀하게 느껴졌다.

판매자가 돌려준 천 원은 교환가치로서의 천원이 아니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는 과자 한 봉지 못 사고 시내버스 차비도 하지 못한다. 판매자가 보낸 천 원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양심과 문화와 종교와 신념과 상도(商道)가 들어 있다. 이 시대에 널린 귀차니즘과 대충주의에 저항하는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귀한 윤리적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자발성에서 온다고 본다. 자발성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원해서 가난하게 사는 자발적 가난, 자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자발적 복종, 자발적인 물러남 등이 그렇다. 자발적 행동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우리 사회가 작동되는 기본 시스템은 ‘타의적’이다. 다른 사람(주로 자본가나 권력자)의 뜻에 의해 대중은 사고하고 움직인다. 심지어 사소한 물건 하나 사는데도 우리는 광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기도 모르게 외부적 의도에 조작되어 따라가는 것이다. 누가 그려놓은 줄인지도 모르면서 그 줄을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고, 누가 설치해놓은 안전난간인 줄도 모르면서 그 난간에 있다고 마음을 놓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주류의 흐름에 반하여 거슬러 오르는 일이 자발성이다. 세상은 여기서부터 새로운 기운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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