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사투리즘을 찾아서]

사투리에는 인간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스며 있다. 그래서 사투리는 생사고락의 살아 숨 쉬는 말맛이 깊다. 사투리에는 아득한 시간과 영원의 정서가 묻어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요즘 뭇 사람들 사이에선 충청도 사투리가 단연 인기를 끈다. 한때 약방의 감초 역할에 그쳤던 충청도 사투리가 하나의 문화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와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충청도 사투리가 이렇게 흥할 수 있던 배경은 뭘까. 흐릿하게 잡히는 그 이유를 분명히 찾고자 충청도 사투리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충남 예산으로 가기 위해 이른 아침 장항선 기차에 몸을 싣는다.

감초 역할 머물던 충청의 말 이제 문화아이콘으로
절제와 함축엔 상대에 대한 배려 담겨
같은 충청이어도 사투리는 각양각색
표준말화 된 사투리 보존 필요성 대두

◆ 사투리에 담긴 충청의 멋

이제는 지가 역겨운 감유
가신다면유 어서 가셔유

임자한테 드릴건 없구유
앞산의 벌건 진달래꽃
뭉텅이로 따다가 가시는 길에 깔아 드리지유

가시는 걸음 옮길 때마다
저는 잊으셔유 미워하지는 마시구유
가슴 아프다가 말것쥬 워쩌것시유

그렇게도 지가 보기가 사납던가유
섭섭혀도 워쩌것시유
지는 괜찮어유 울지 안컷시유
참말로 잘가유 지 가슴 무너지것지만
워떡허것시유 잘 먹고 잘 살아바유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충청도 버전이다. 느리지만 상처주는 직설이 적고 해학이 넘친다. 가히 이것이야말로 감히 표준어로 흉내낼 수 없는 충청도 사투리의 매력 포인트다. 타지 사람들은 충청도 사람의 속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충청도 사람인 나조차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충청도 사투리에 담긴 화법 탓이 아닐까. 충청도 사투리엔 은근 비유적 표현이 많다. 입으로 나오는 표현뿐만 아니라 간혹 몸짓과 손짓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경우도 적잖다. “됐어”라는 말이 좋은 예다. 이 표현을 고개를 돌리고 하느냐, 손사래 치면서 하느냐, 말끝을 올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듣는 이는 냉온탕을 오가기도 한다.

좀더 살을 보태자면 충청도 사람들은 직접적인 화법보다 우회적인 화법을 더 선호한다. 축약도 많다. ‘한술 뜰겨?(밥 한그릇 할래?)’, ‘겨? 아녀?(맞아? 아니야?)’, ‘좀 봐유(잠깐 얘기 좀 해요)’ 등 복모음(ㅕ, ㅠ, ㅑ)이 풍부하다. 축약을 기반으로 한 비유와 우회. 이쯤되면 왜 충청도 사람 속내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건지 어렴풋이는 알 것도 같다.

◆ 충청인, 그들만의 대화법

그래도 속시원한 답을 찾아야겠다. 그래서 떠난다. 서대전역에서 천안역으로, 다시 천안역에서 예산역으로. 그분을 만나기 위한 2시간의 여정은 기차와 함께한다. 경부선 철도에서 장항선으로 옮겨가려면 기차 환승은 필수다. 그래야 그가 있는 예산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난생 처음 기차 환승에 기다림의 시간은 고단했지만 지치진 않는다. 회사밖에서의 시간은 늘 즐겁기에. 한참을 달려 예산에 도착하니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났다. 배가 고파 그런지 영 몸 상태가 시원찮다. 예산역을 나오자마자 이짝저짝 훑다 가장 먼저 들어온 김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 이유다.

김밥 한 줄, 칼국수 한 그릇 주문하고 난 뒤 잠시 TV에 두 눈을 고정하려는 순간 들렸다. 충청도 사투리다. 손님과 사장님의 실랑이가 충청도 사투리를 타고 귓가를 때린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더니 김밥을 주문하던 손님은 충청도 특유의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듯 사장님에게 김밥 포장을 재촉한다.

“저기, 얼른 김밥 3개만 포장해줘유.”
그런 사정 아는지 모르는지 사장님은 느긋하고 여유만만이다.

“그럴거면 전화를 허고 오지 그랬슈.”

유쾌하게 받아치는 여유가 제법 고수다. 그런 사장님을 보곤 너무 과하게 재촉했다 싶은지 포장 끝난 김밥을 들고 현금으로 계산을 하던 손님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떠났다.

“잔돈은 됐슈.”

충청도 사람이면 이해하고도 남는 그들만의 사과 방식이다. 대전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려면 한 시간 안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여유부릴 시간은 없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후딱 나와 골목을 걷고 걸어 마침내 시인이자 충청도사투리 지킴이를 자처하는 이명재 작가의 사무실 앞에 당도했다.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 그런 다짐과 함께 사무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안 열린다.

“뭐여.”

당황스러움에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간다. 안 받는다. 망했다. 내가 아니라 창간기념호가 망하겠지만 그래도 편집국에 뭐라 변명할지 머리 속 주판알 굴리는 소리가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던 순간.

“여보슈. 아아~. 껌뻑하고 외출했는디. 죄송해유. 쫌 늦을 거 같은디 여서 달려가면 20분이면 금방 가유.”

한참 뒤 저멀리 보이던 그의 실루엣은 달려온 느낌은 아니었는데 천상 충청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 MZ세대도 반한 충청도 사투리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를 만났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화할 시간은 단 30분밖에 없다. 이래저래 돌려돌려 사정을 설명하니 내가 누군지, 자신이 누군지 자세한 인사는 생략하잖다. 얘기하면 정들테니 그거면 된다고. 속도감 있고 좋다. 그 누가 충청도 사투리를 답답함의 대명사라 하였는가.

“사람은 말로 살아가잖어유. 충청도 사투리에 담긴 어법이 절제와 함축인 게 특징이쥬. 직설적이지 않고 돌려서 표현하기도 허고. 상대방을 공격하기보다 배려하고, 보듬고, 공감해주는 게 여기 말이여. 충청도 말 속엔 충청도 사람의 삶의 양태가 고스란히 묻어있지.”

충청도 사람들은 표현 방법이 독특하다. 말보다 상황에 의존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커피를 대접하면서 “아이고, 줄 게 커피밖에 없고 맛도 없는디 어뜨케 한댜”라고 말할 때 행위에 주목하면 이해하기 쉽다. 커피를 내주면서 하는 말이면 긍정적이고 좋은 분위기가, 커피조차 안 타주면서 하는 말이라면 부정적이라고 보면 되는 식이다. 그는 대전에서 예산까지 찾아온 내게 차를 한 잔 건넸으니 이쯤이면 호의적인 것이다.

충청도 사투리라고 해서 이곳저곳이 다 같진 않다. 지역 따라 천차만별이란다. 지형적 특성이 여러 버전의 충청도 사투리를 만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차령산맥과 금강이 지나가는 충청도는 공주를 기점으로 대전, 공주 위에 있는 예산과 온양(아산)은 거리상 가깝지만 사투리는 천지차다. 범주를 더 넓히면 충북과 충남 사투리가 다르다. 같은 충청도라 해도 충북 충주는 사투리나 말의 억양이 강원도 원주·춘천, 경기도 여주·이천과 유사한 것처럼 말이다.

“어느 지역, 어느 환경이냐 따라 사투리의 특징이 갈리쥬. 충남 안에서도 홍성·서산·당진·태안은 비슷헌데 딴 지역은 차이가 있어유. 금산도 사실 전라도 말에 가깝지, 충청도 말이라 보긴 쪼까 어려울 겨. 생활권에 따라 사투리도 각양각색이라고 생각허면 뎌.”

그럼에도 충청도 사투리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화법만큼은 어딜가나 차고 넘친다는 게 그렇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이가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었다. 저 서양에서는 충청도 사투리의 멋을 우리보다 먼저 알았나보다. 그의 저서 ‘문화를 넘어서’엔 이런 말이 있다. ‘고맥락성의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때 상대방은 이미 자신이 하려는 말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돌려서 이야기하게 되며 핵심을 집어내는 일은 듣는 사람의 몫이 된다. 말하는 사람이 핵심을 일러주는 건 듣는 사람에 대한 인격 모욕이자 침범’이라고. 이제 충청도 사람들을 오해하지 마시라. 이것이 바로 충청도 사람들이 추구해 온 배려의 대화법이다.

“충청도 사투리는 상대를 자극하지 얺고 부정적인 말을 쓰지 않아 듣는 사람이 힘들지 않쥬. 고급 화법이유. 다만 일을 할 때는 이게 단점이 될 수도 있으니꺼 조심해야지. 싸게싸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디게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그래도 충청도 사투리만큼 고급진 말은 없어유.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 빵 터지는 카타르시스적 요소도 있고 여유로운 말투는 빡빡한 삶에 여유마저 던져주니께.”

각박한 세상에 한줄기 감칠맛을 던지는 사투리의 존재는 아쉽게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말이나 어투가 표준말화되면서다. 그래야 현대인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이런 현상은 젊은 사람들에게 유독 짙다. 더 시간이 흐르면 사투리가 사라질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꾀병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세대에게만큼은 확실히 재조명되는 흐름을 탄 충청도 사투리의 요즘 위상을 보고 있으면 그는 위안을 얻는다. 즉문즉답보다 은유적 직답에 가깝고, 축약적이며, 해학적이고, 능청스러움 멋드러진 충청의 말이 시대와 통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간 충청도 사투리는 언어적 시각에서만 다뤘는데 문화적인 색다른 측면을 발견한 거쥬. 많은 매체를 통해 충청도 말의 기질적인 표현이 부각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유. 사투리에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스며있쥬. 소중히 보존해야 할 유산이란 얘기여.”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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