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고향(故鄕)이라 부른다. 세상에 태어난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고향은, 싫든 좋든 낙인처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채 근원을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죽하면 꿈에서도 차마 잊히지 못할 곳이라는 시적 비유가 나왔겠는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탓에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의 고향을 물으며 그의 뿌리를 더듬거리기도 하는데, 이런 고향이 무려 두 곳이라는 한 청년이 있다. 바로 윤철욱(37) 씨다. 그는 대전이 마음 깊이 간직한, 정든 두 번째 고향이라 말한다.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시작은 평범했다. 그가 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대전에 오게 된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모든 고등학교 3학년이 그렇듯 그는 대학 진학을 위해 성적에 맞는 여러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한 대학교 중 대전에 있는 곳을 택했다.
“고향인 대구가 소재인 대학교에도 합격했었어요. 그런데 굳이 대구를 떠나 대전을 택한 건 ‘자유’를 위해서였죠. 부모님은 매우 다정하고 화목하셨지만, 통금시간에 있어서는 엄격했습니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다 밤 10시가 되면 항상 전화를 하셨고, 귀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품이 아닌 타지에서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죠. 이를 위해선 부모님께 대전에 있는 학교에만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오게 된 대전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딱 맞았다. 20대 초반의 대학 생활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 만난 인연은 지금껏 이어져 적적할 때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소중한 존재가 됐다.
◆뜻밖의 고난과 방황
그가 대전에서 처음으로 인생의 좌절을 느낀 건 어릴 적부터 꿈꿔온 교사란 꿈을 포기했을 때다. 교사가 되고 싶어 대전에 왔지만, 교원임용시험의 벽은 높았다. 그 높은 벽을 깨부수기 위해 다년간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공부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매년 고용의 불안을 느끼며 학교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이어가던 그는 30대 중반이 되던 해 잡고 있던 줄을 놓기로 결심했다.
“대전에서 기간제 교사로 약 7~8년 일했어요. 기간제는 매년 계약을 새로 해야 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너무 컸죠.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꿈을 위해 일을 잠깐 쉬면서 공부도 해봤지만,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비용이나 시간이 적잖게 들어가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서른네 살이 되니 이력서에 나이 제한이 걸리기 시작해 더 늦기 전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에 타협하며 되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죠.”
그렇게 두 번째로 발 들인 업계는 네트워크 통신 분야였다. 새로운 도전이었던 만큼 살신성인 열심히 했는데 월급이 두 달 넘게 밀렸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로 일거리가 끊겨서다. 개인이 하는 영세한 기업이라 내부 사정을 잘 알던 그는 밀린 월급을 받지 않고 세 번째 직장을 찾아 떠났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보니 건설업계에 취직했습니다. 약 1년 반 정도 근무했죠.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좋았지만,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떠돌아야 하는 삶이 힘겨웠습니다. 과연 돈을 위해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결국 적게 벌더라도 안정적으로, 한곳에 머물 수 있는 현 직장으로 오게 됐습니다. 사무기기를 취급하는 회사인데 재직한 지 4년이 다 돼 갑니다.”

◆다사다난했지만…
새로 이직한 곳에 적응하며 승진까지 한 그. 잘 정착한 일만 남은 줄 알았다. 남 못지않은 가정을 꾸리겠다 다짐했다. 그가 전세로 사는 다세대주택이 경매에 넘어가기 전까진. 평범하게 느껴졌던 삶의 목표가 욕심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같은 건물에 살던 한 입주자가 계약 만료로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요구했는데 집주인이 ‘다른 세입자 들어올 때까지 못 준다’고 했다더라고요. 그래서 그분이 경매 신청을 한 거죠. 현재 제 전세금도 묶여 있는 상황인데, 집주인은 연락이 잘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는 6개월 뒤 경매가 진행될 거라 연락이 온 상태고요. 묵시적갱신 상태라 집주인에게 내년 1월까지 전세금을 돌려달라 요구했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적잖은 불행의 파도에서도 그는 누군가를 책망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라앉지도 않았다. 타고난 긍정적 사고가 힘이 된 까닭이다. 그는 몰아치는 고난에도 ‘어쩔 수 없다’며 묵묵히 바다 위를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대전에 온 걸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대전에서 만난 인연들과 쌓은 추억이 너무 소중하게 자리 잡았거든요. 꾸준히 서로를 챙기며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요. 대전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제 주변 사람들도 못 만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집이 문제인 거지 나머지는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체 지나간 일에 후회하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바람이 있다면 지금 다니는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 가정을 꾸리며 사랑하는 이와 즐겁게 사는 것뿐입니다.”
글·사진=김세영 기자 ksy@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