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신아트컴퍼니 연극 ‘피란 : 사라진 시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
대전 피란 후 거짓담화한 사건 다뤄
허위 방송 송출 과정 속
‘진실왜곡 책임 누구에게 있나’ 질문 던져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늘 그런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역사에서 행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이룩한 성취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역사만큼 훌륭한 교사는 없다.
돌이켜보면 1950년 한국전쟁은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에 접어든 지도 7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는 장면 하나가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다. 6월 27일 대전으로 피란한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 대통령 관사가 된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자신은 피란을 떠났으면서도 국민에겐 ‘유엔(UN)에서 도와주기로 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했다. 이후 국군은 인민군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28일 새벽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믿고 피란 가지 않았던 시민들과 피란 짐을 꾸려 한강대교를 건너던 시민 모두 그렇게 전쟁의 첫 번째 피해자가 됐다. 아신아트컴퍼니가 제작해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공연한 연극 ‘피란 : 사라진 시간’의 배경이다.
연극은 서울 합동수사단 조사관실을 배경으로 막을 올려 시종일관 긴박하게 전개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는지가 연극의 큰 줄기다. 연극은 서울중앙방송국 직원 주칠성을 중심에 놓고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의심하지 않은 채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의 고난을 다룬다. 이들은 국군의 서울 수복 후 대부분이 부역자로 처형되거나 수난을 겪었다. 주칠성도 부역자로 몰려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채로웠던 건 연극 내내 뚜렷한 선과 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전담했던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우병훈, 서울중앙방송국 보도과장 공현종 등 주인공들은 하나하나가 전쟁이 낳은 또다른 피해자였다. 심지어 검사로 등장하는 인물인 주상현을 보는 내내 그에게서 밉다기보다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그도 결국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연극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겁게 흐른다. 웃을 시간이 없다. 특히 배우들의 분명한 딕션(diction)은 좋다못해 연극이 가진 특유의 무거움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힘을 줘야 할 때와 뺄 때의 구분이 그만큼 명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 좌우이념 대립, 부역자 등 꽤 어려운 주제를 소화하는 연극임에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칫 배우들의 합이 맞지 않았다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주제인 탓에 연출 과정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연극은 자연스럽게 관객들로 하여금 깊은 고민의 시간을 갖게 한다.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 대부분이 좌익은커녕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일반 국민이라는 사실에서다. 어느덧 반 백년이 훌쩍 지나버린 오늘날에 이르도록 여전히 세상의 누군가는 그들을 부역자라고 부른다. 70년 넘는 세월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했던 희생자와 유족들에게서 부역이라는 덫을 제거하는 것, 연극은 남겨진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그것이라는 점을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전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