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누구나 겪는다. 많은 걸 헤매기도 하고 잠시의 방황도 있겠지만 창천으로 날아오르기 위한 날개를 얻고자 인내의 시간을 보내는 번데기와 같은 게 청춘이다. 모두가 겪었을 인고의 시간이 안타까워 우리는 조언을 건네지만 속세에 젖은 꼰대의 이야기는 어쩌면 진부하다. 모두가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조언이 있다면 좋지만 그 조언은 결국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수많은 타인 중 하나로 투영될 뿐이다. 그래서 자신다움을 강조하는 게 나쁘게 말하면 건방지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성은 분명하다. 전국적으로 조소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전 토박이 김우진(37) 작가의 이야기다.
◆ 늦게 핀 예술가의 재능
대부분 예술가가 그렇듯 김 작가의 활동 반경은 서울이다. 대한민국은 서울과 떼려야 뗄 수 없기에 그 역시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활동한다. 제법 자리를 잡은 예술가는 그래서 아예 서울로 주소를 옮기곤 하지만 김 작가는 순수 대전 토박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배웠고 한 번도 주소를 대전밖에 둔 적이 없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도대체 예술을 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대개 가족의 영향을 받아 시작하는 사례도 있기에 물었지만 아니란다. 생각보다 단순했다.
“고등학생이 되니까 입시를 준비하느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는데 이걸 견디지 못했어요. 공부보단 낫겠다 싶어서 2학년이 되자 바로 예술고등학교로 전학했죠.”
비록 남들보다 늦었지만 예술인의 재능이 피우는 순간이었다. 그가 선택한 건 바로 조소. 재료를 깎고 새기거나 빚어서 입체적인 형상을 제작하는 조각 활동이다.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하는 것보단 여러 가지 재료를 가져와 직접 손으로 빚고 깎으면서 하찮은 것이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매력을 느꼈단다. 조소를 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이걸로 밥벌이를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공부를 싫어했던 김 작가는 당당하게 한남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예술을 한다는 건 많은 돈이 든다고들 하지만 늦게 핀 꽃이 아름답듯 제법 실력 좀 있었는지 장학금을 받으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로 들었다.
◆ BTS’s Pick 아닌 김우진
대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이 생각보다 비싸지 않단 뜻이지 예술엔 돈이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조소라 하면 매일 자신이 깎고 작업해야 할 재료를 구해야 했는데 이게 제법 비쌌단다. 돈이 없으니 한동안 온갖 잡화는 모아서 작업을 했다고. 학교에선 “한 작품을 오래 연구해서 작업해야 한다”라고 가르쳤지만 그는 재료가 충분(?)했기에 다작을 연습했다. 자신만의 방법이었다. 특이한 재료, 남들과 다른 작업 방식인지 졸업 이후 그는 금방 조소 쪽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의미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특이한 작품이라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키아프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전시할 기회도 가졌다. 그가 전시한 작품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사슴. 자연을 상징하는 사슴과 스테인리스란 이질적인 만남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아트페어였는지 흔히 말하는 셀럽이란 셀럽은 다 모여들었고 여기엔 세계적인 보이그룹 BTS의 RM과 뷔도 초청됐다. RM은 워낙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였기에 아트페어에서 자신이 직접 작품을 골랐지만 뷔는 그렇지 않았기에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구경했단다. 도슨트는 여러 작품을 소개했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김 작가의 이질적인 작품 앞에 멈춰 한동안 감상했다. 그리고 김 작가의 작품을 샀다. 워낙 유명한 셀럽이라 그가 김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는 순간 아트페어에 모든 이목이 김 작가의 작품으로 실렸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여서 김 작가는 어딜 가든 ‘BTS의 픽(pick)’이라는 꼬리표가 생겼다.
“물론 좋죠. 전세계적인 그룹의 멤버가 제 작품을 산다는 게. 그런데 너무 꼬리표가 됐어요. 김우진 작가보다 BTS가 선택한 작가라는 소개가 더 많죠. 그래서 저를 소개할 때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게 더 좋아요. 그렇기 위해선 더욱 정진하고 좋은 작품 선보이며 전시를 가져야죠.”
◆ “나다운 게 무엇인지”
그가 이렇게 유명해진 건 BTS의 선택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남들과 조금 다른 작업 방식도 작용했다. 대개 예술품은 희소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값어치가 있다고. 가장 큰 예가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오귀스트 로댕과 그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이다. 서로는 서로를 스승과 제자로 삼으며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와 함께 사랑을 나눴다. 워낙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서로의 작품은 비슷해졌고 결국 둘은 갈라서게 된다. 작품의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작가도 한창 배울 적엔 “다작하지 말라”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그러나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실력을 갈고닦기 위해선 수많은 연습이 전제돼야 하고 당연히 수십, 수백의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전 그런 말을 되게 싫어해요. 예술은 밤에 영감이 샘솟기에 예술인은 밤낮이 바뀌어야 한다, 예술은 배고파야 한다, 대중적이면 안 된다. 동의하지 않아요. 물론 저보다 먼저 걸어온 선배이기에 조언을 한 것이지만 조언을 따라가면 김우진이란 작가의 예술은 없었을 거예요. 남들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작업하고 연습해 다작한다면 그게 더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청춘에게 모나지 말라고 한다. 남들처럼만 하라고 한다. 그래야 어디서 맞지 않으니까.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우리 모두 한 번씩 갖고 있었다.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일종의 반항심. 가장 나답고 싶다는 자존감. 김 작가란 좋은 선례가 있으니 청춘이라면 이런 고민을 한 번씩은 해봐도 되지 않을까.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