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6·25 이후 휴전선 넘어 북한이 그렇고,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근세까지 식민 통치의 향수에 젖어 동해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그리고 역대 왕조에서 조공을 받았던 중국도 지금까지 종주국처럼 행세하고 있는 등 우리를 둘러싼 주변국들은 모두 ‘가깝고도 먼 나라’들이다. 여기에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공에 쫓겨서 남쪽으로 약 161㎞ 떨어진 작은 섬 대만으로 쫓겨간 국민당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승인해 준 세계 유일의 우방이었음에도 1992년 8월 노태우정부 때 중국공산당과 전격 수교하면서 단교한 미숙한 외교로 지금까지 원한을 품고 있다.

대만은 남북 약 395㎞, 동서 약 145㎞, 면적은 3만 6000㎢ 남한(9만 8000㎢)의 약 1/3 정도 작은 섬으로서 근세까지도 중국에서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지중해에서 벗어난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1590년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처음 발견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프로모사((Ilha Formosa)’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졌다. 이후 서구 세력들이 아시아에 진출하면서 통상을 시도했지만 명(明) 제국이 응하지 않자 1624년 네덜란드가 무력으로 대만 남부 타이난(台南)을 점령하고 젤란디아성(Zealandia: 熱蘭遮)을 쌓았다. 그 뒤를 이어서 1626년 에스파냐도 대만 북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주도권 다툼 끝에 1642년 네덜란드가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총독이 섬 전체를 통치했다. 네덜란드는 이곳을 1602년 말라카해협에 있는 바타비아(Batavia: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왕래하는 무역거점으로 삼았다. 바타비아를 거쳐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네덜란드 선박이 태풍이나 풍랑으로 제주도에 자주 표류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627년(인조 5년) 베텔브레이(Weitervree: 한국명 박연), 1653년(효종 4년) 8월 난파되었다가 포로 생활을 하던 중 13년 만에 탈출하여 서양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Hendrik Hamel) 등이 있다. 한편, 만주족인 누르하치(태조)가 후금을 건국하고, 그의 아들 태종은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더니, 1644년 명을 멸망시켰다. 이때 명조 부흥운동을 벌이던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으로 건너와서 1662년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냈다. 이로써 네덜란드의 대만 통치는 38년 만에 끝났지만, 200년 뒤인 1839년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이 청과 남경조약을 맺었지만, 청의 미온적인 자세에 불만을 품던 중 청의 관리가 영국 선박의 영국기를 밟았다는 트집으로 벌인 애로호사건(Arrow;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1858년 톈진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대만의 북쪽 해안도시 단수이(淡水)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은 공동출병했다가 청일전쟁을 벌였으나, 패한 청은 랴오둥반도, 대만, 대만해협에 있는 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일본에 할양했다. 이후 일본은 1945년까지 50년 동안 대만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 통치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여러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대만에는 원주민의 토착문화를 비롯하여 식민 통치했던 에스파냐·네덜란드는 물론 영국·일본의 식민문화가 혼재된 여러 나라의 문화를 볼 수 있다. 특히 섬 전체가 마치 일본으로 한 지방도시로 여겨질 정도로 일본문화가 널려 있다.

그런데,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개석(蔣介石:1887~ 1975)이 대만의 타이베이(台北)에 임시수도로 삼은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쫓겨간 이후에도 UN 창설의 주역으로서 강대국의 특권인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누렸으나, 197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른바 ‘핑퐁 외교’로 미국이 중공과 수교하더니, 1971년 10월 중공이 국민당 정부를 대신하여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UN에서 퇴출됐다. 1972년 1월 미국은 중국을 대표하게 된 중국공산당 중화민국(中華民國)과 수교하고, 우리도 1992년 8월 대만 정부와 단교했다. 2024년 현재 대만의 수교국은 12개국 정도에 불과하여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잘 말해 준다. 국제사회에서는 대륙의 중국을 유일한 주권 국가로 인정하고, 대만 정부는 중국의 일부인 ‘중화 타이베이(中華臺北: Chinese Taipei)’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우리가 남북 분단 이후에도 한반도를 우리 영토로 간주하듯이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국호를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 하고, 중국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도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하여 대만을 1개의 성(省)으로 간주하고 있다. 대만은 수도 타이베이(台北)를 비롯하여 신베이(新北), 타이중(台中), 타이난(台南), 가오슝(高雄), 타오위안(桃園) 등 6개 직할시, 지룽(基隆), 신주(新竹), 자이(嘉義) 3개 시, 13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주민은 2400만 명이다. 수도 타이베이에 235만 명이 살고 있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염원하듯 국민당 정부는 대륙 회복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지만, 통일에 대한 전망이 점점 암울해지자 1980년 대만 원주민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약칭 민진당)은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탈중국화를 시도하고 있다. 1987년 국민당 정부가 40년 동안 시행했던 계엄령을 해제하고,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민진당 후보 천수이볜이 당선된 이후, 2016년 5월 총선에서도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어 연임한 뒤, 2024년 5월 총선에서도 민진당의 라이(賴清德: 1959~) 총통이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본토 수복을 꿈꾸는 국민당과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이 대립은 ‘대만판 남남갈등’이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대만은 우리보다 일찍 수출 정책으로 높은 무역의존도는 세계 경제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 점도 있으나, 반면에 PC·정보통신 등 중소기업 중심의 IT기술은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대만에서는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예류 지질공원(野柳流地質公園), 천등(天燈)으로 유명한 스펀(十分), 일제강점기에 금광을 캐던 폐광 지대를 개발한 진꽈스(金瓜石), 광산촌의 먹거리 골목으로 유명한 지우펀(九份)의 첫 글자를 딴 ‘예스진지’를 4대 관광지로 개발했고, 일제강점기에 목장으로 개발했던 영명산국립공원 등이 볼 만하다. 2023년 국민소득은 3만 3000달러이고, 통화는 신 타이베이 화(TWD)라고 한다. TWD의 기본단위는 위안(元)인데, 대만인들은 위안을 원(圓) 혹은 콰이(塊)라고 한다. 우리 환율과는 1TWD= 42.95원이다.(2024년 11월 현재)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