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에서 찾는 ‘트렌드 코리아 2025’]
월간 이이김김 신년특집
1. 광복 80주년 다크투어리즘 보고서 Ⅳ
2. 독립운동의 심장 독립기념관에 서서
3. 평범과 무해를 갈망하는 사람들
4. 무해한 것이 힘, 무해력의 힘
5. '무해력' 만들어본 김세영 기자

길을 걷거나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때마침 시선을 뺏는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나타난다. 하얗고 몽실몽실한 털에 검정 단추 세 개를 박아 놓은 듯한 얼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환호성이 피어나곤 한다. ‘귀여워.’ 기자에게 있어 개는 그런 존재다. 작고 귀엽고, 서툴지만 순수한 것. 보기만 해도 무해해서 우울함과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것. 기자의 무해력 원탑으로 꼽히는 개와 요즘 젊은이들이 가방에 많이 달고 다니는 키링을 결합해 ‘무해무해력’의 무언가를 만들어봤다. 이름하여 유해한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될 몽구키링’이다.(몽구는 기자가 키우는 개 스피츠의 이름이다.)
주말 오전 10시경 대전 서구 관저동 한 대형상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휘날리는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이곳은 그야말로 무해함 집합소였다. 진짜 개와 똑같이 생긴 공예품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기자를 반기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크기부터 실물 크기와 똑같은 아트돌, 금방이라도 액자에서 뛰어나올 것 같은 양모펠트 액자 등등. 보기만 해도 뽀송한 모습에 쓰다듬고 싶었던 욕구가 공예품 사이 안내된 ‘눈으로만 귀여워 해주세요’ 문구에 겨우 들어갔다. 원데이클래스에 앞서 강사와 짧은 자기소개를 나누고 본격적인 양모펠트키링 만들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구 만들기였다. 책상에는 벽돌모양의 흰 스펀지와 송곳이 놓여있었다. 미색의 양모를 동그랗게 뭉친 뒤 스펀지 위에서 바늘 같은 송곳으로 마구 찌르며 단단한 모양을 잡아갔다. 모양도, 도구도 마치 타코야끼를 연상케 해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장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어 가로 1㎝, 세로 1.5㎝의 원기둥을 제조했다. 개의 감각 중 가장 발달한 후각, 코가 달린 머즐을 구현해주기 위함이었다. 완성된 두 조각을 붙이니 피노키오 같은 모양이 나왔다. ‘과연 몽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곧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갈 길이 한참 멀었기 때문이다. 자수 가위로 몽구의 눈과 코가 들어갈 부분을 십자로 잘라준 뒤 못 모양의 눈과 코 파츠를 집어넣었다. 눈두덩이 색감을 보라색 양모로 덧대 맞추고 결을 따라 털을 붙이는 무한 노가다의 시간이 펼쳐졌다. 마치 두피에 머리카락을 이식하듯 구에 양모를 한땀한땀 심었다. 기자가 타코야끼 장인이었다면, 적어도 5만 개를 생산해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구를 송곳으로 많이 찔러야 했다. 4시간의 털 이식 작업 끝에 하얀 ‘무도사’가 나타났다. 하찮고 귀여운 모양새에 피식하고 작은 실소가 자꾸만 터져 나왔다.





헤어볼 같았던 양모가 그럴듯한 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자, 강사는 본격적인 미용에 들어갈 것임을 선언했다. 그렇다, 보기에만 진짜 같았던 것이 아니었다. 실제 애견미용 시 사용하는 미용가위와 바리깡, 자수 가위를 들고 몽구 사진을 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윤곽을 잡았다. 입고 간 검은 후드티에 양모가 잔뜩 엉겨붙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이 된 기분이었다. 고대의 한 조각가처럼 양모펠트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순차적으로 입과 귀를 달고, 키링 고리를 이어주고, 몽구의 아이라인(?)을 묘사해 주니 처음 들어왔을 때 진열돼 있었던 공예품 같은 완성도가 나왔다. 장장 6시간 30분의 대장정을 마치고 완성품을 들어보니 너무도 앙증맞고 깜찍해 힘줘 들 수도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혹시나 모양이 흐트러질까 조심스럽게 종이백에 넣고 흰색의 양모를 뿜어대며 강사와 작별 인사를 했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치일 때마다 한 줌의 희망이 돼 주길. 유해한 세상에 태어나고 만 이 무해한 것의 자리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행복하게 고민했다.
글·사진=김세영 기자 ksy@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