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최근의 혼란스러운 시국을 맞이하여 우리 충청지역 선배 문인들은 당시의 난국을 어떻게 수습하고 극복하려 했는지 문학산책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고려말 새로운 정치와 개혁을 주도했던 원나라 유학파 문학인 가정 이곡을 문학산책하고자 한다.

◆ 이곡의 생애와 가계- 그 아버지 그 아들
이곡(李穀·1298~1351)은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한산. 자는 중보, 호는 가정. 초명은 운백. 시호는 문효.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과 흥례이씨의 3남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려의 삼은 중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20세에 고려 거자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관이 되었으며 23세에 수재과에 차석으로 급제 후 복주사록참군사로 승진하였다. 그 후 29세에 원나라 과거시험인 정동성향시에 합격하고, 35세(1332년)에 같은 과거에 다시 수석으로 합격하여 여러 보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이곡의 답안은 시험관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으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고려뿐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본국에서는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도첨의찬성사가 되고 뒤에 한산군에 봉해졌다.
1343년 46세 때 원나라에서 중서사전부직을 할 때 외아들인 이색이 고려에서 성균시에 합격한 후 원나라 국정관리자의 아들 자격으로 유학을 와서 공부할 때 “자신을 세우려면 부지런히 공부하는 수밖에/ 천하가 작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너는 기억하겠지/자신이 태산에 높이 올랐기 때문이란다…”라는 시를 지어 아들에게 주었고, 이색은 그 아버지의 영향을 듬뿍 받고 10년 뒤 원나라 과거시험인 회시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고 대학자로서 조선 사대부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이곡은 1349년 51세 때 고려로 귀국하여 관동지역을 유랑하며 많은 글을 쓰다가, 54세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에 움막을 짖고 3년 상을 치르던 중 몸이 쇠약해져 작고했다.
이곡과 그의 아들 이색이 원나라에서 유학하고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은 그들의 타고난 자질도 우수했지만, 그 배경에서는 이곡의 부모님 공이 컸다.
아버지 이자성은 고려 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전라북도 정의대부 정읍감무를 지내며 정읍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그 덕성과 명성이 원나라에까지 알려졌다. 1310년 고려 충선왕 때 그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원나라에서는 봉훈대부 비서감승으로, 고려에서는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에 추증하였다. 또 이자성이 작고한 후 40년간 홀로 아들과 손자를 어질고 현명하게 잘 교육한 어머니 흥례이씨에게는 고려에서는 삼한국대부인으로, 원나라에서는 요양현군으로 추봉하였다.
그러니까 이자성 부부의 덕성이 원나라 당국을 감동케 하고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이자성-이곡-이색 삼대가 원나라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삼대에 걸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 할 수 있다.
◆ 이곡의 문학 작품과 문화유적 개관
이곡의 작품으로는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 ‘죽부인전’과 청빈하고 고뇌에 찬 삶을 살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모진 추위에서도 매화를 찾고자 했던 ‘고한’을 비롯한 100여 편의 한시가 《동문선》에 전하며,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있는데 설의 형태를 띤 ‘차마설’, ‘시사설’, ‘신설’, ‘배갱설’, ‘사설’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증수하였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조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곡과 관련된 문화유적으로는 그를 배향하고 있는 영해의 단산서원과 서천의 문헌서원이 있다.
단산서원이 있는 영해는 이색의 외가가 있는 곳이고 이색이 태어난 곳이다. 그러니까 이곡의 처가 동네이다.
반면 문헌서원이 있는 서천은 이곡과 이색 한산이씨의 본향이며 생활의 근거지였다. 이곳 문헌서원은 이색과 이곡을 주벽으로 모시고 있고, 이곡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효정사와 장판각이 있다.






효정사는 이곡, 이색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문헌서원 사우이다. 효정사는 1575년 한산 군수로 온 이성중이 기린산 기슭(현 기산면 영모리) 이색의 묘 아래에 사당을 짓고 문효공 가정 이곡과 문정공 목은 이색의 시호를 따서 ‘효정묘’라 한데서 유래된다. 그리고 장판각에는 이곡의 문집 ‘가정집’ 20권과 이색의 문집 ‘목은집’ 55권 등을 인쇄하는데 필요한 947개의 목판과 한산이씨 족보와 세보 등을 발행하는데 필요한 501개의 족보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또 충남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10-1에 이곡의 묘소가 있으며 그 주변에 그의 부인 함창김씨의 묘소도 있다. 그리고 문헌서원과 주변의 산에는 목은 이색과 그의 아들과 할아버지 이자성과 할머니 흥례이씨의 묘소도 있다.






◆ 새 정치, 세상의 모든 것은 빌린 것이라는 인식부터
이곡은 원의 성리학을 수용하고 성리학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를 통하여 태평한 나라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신설’을 지었다. 그는 ‘신설’에서 고려의 풍속은 무너지고 형정은 문란해져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고 역설하고, 고려는 굶주린 자가 밥을 찾고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백성들이 목을 빼고 새 임금을 기다리고 눈을 씻으며 새 정치를 갈망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해결 방책으로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 했다.
또 이곡의 ‘차마설’은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을 비롯해 많은 지식인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뭐가 있을까. 임금은 백성한테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해진다. 신하는 임금한테 권력을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된다. 자식은 부모한테서, 아내는 남편한테서, 종은 주인한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무척이나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이곡, ‘차마설’에서
이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빌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삶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에만 몰두하면서 권력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나만 가져야 할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현재의 정치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본사상의 기초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빌린 것이라는 인식은 민주주의를 성립되는 기본 원리요 서로 공존하는 원리이다. 이것은 또 권력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살이의 관계에 다 적용되는 말이다.
◆ 인간 시장 금지, 공녀의 징발을 멈춰라
이곡은 개경의 시장에 가서 세 가지의 나쁜 상거래를 보고서 세태를 비판하고 경계하는 ‘시사설’을 썼다. 그는 ‘시사설’을 통해 첫째 성을 거래하는 풍속의 비루함. 둘째 뇌물이 횡행하는 관리들의 세계를 통해 엉망인 형정. 셋째 흉년의 기갈을 참지 못해서 아이와 아내와 종을 내다 파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 시장의 세태 등을 통렬하게 고발하였다. 그리고 이것들을 바로 잡지 않으면 그 폐해가 더욱 심해질 것을 경계하였다.
이곡은 또 공녀를 징발하는 고려의 비참한 참상을 조목조목 알리며 동녀구색 중지를 탄원하는 상소문을 원나라 황제에게 올렸다.
“지금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 고려 여자를 자기들의 처첩으로 삼아 데려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 중국의 사신이 나오면 온 나라가 시끄러워 닭이나 개까지도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선발된 처녀들의 부모와 종족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니 그 애처로운 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슬픈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고, 그들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다가 시력을 잃는 자도 있어서 이러한 참상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이곡, 동녀구색 중지를 탄원하는 ‘상소문’에서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황제를 감동케 하여 공녀의 요구를 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고려에서는 혼례 때 곡자상을 차려서 이곡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전통 등이 생겼다.
이러한 이곡의 ‘시사설’과 ‘상소문’의 정신은 고려 가전체 문학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죽부인전’으로 이어진다.
이곡이 지은 가전체 문학의 대표작 ‘죽부인전’은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현숙한 여인의 모습과 함께 여성의 정절에 관하여 서술한 것으로, 후세에 많이 발생하는 '열녀전' 부류의 원형으로 유교 사회 여성의 이상형이 되었다. 성리학자였던 이곡의 눈에는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여성들이 물건 취급당하며 사고파는 모습이 성적 문란과 퇴폐로 간주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죽부인전’은 이상적인 여인상을 죽부인으로 한 일종의 열녀전을 써서 당시 타락한 사회적 병폐를 비판하고 유교 문명사회를 세우고자 노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