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새 정부의 내각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이에 이번에는 집안에서는 효도를, 조정에서는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청렴과 소통의 실천으로 조선시대 명 정승의 반열에 올라 공직자의 모델을 뛰어넘어 인간다운 삶을 제시한 청백리 고불 맹사성의 발자취를 문학산책하고자 한다.

고불맹사성기념관 공원에 있는 고불 맹사성 조형물로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불맹사성기념관 공원에 있는 고불 맹사성 조형물로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이름값을 한 고불의 생애

맹사성은 1360년(고려 공민왕 9) 7월 17일 아버지 맹희도와 어머니 흥향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충남 아산 사람으로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또는 성지, 호는 고불, 시호는 문정이다.

어머니가 태양을 삼키는 태몽을 꾼 후 태어난 사성은 15세가 된 후에는 자명 또는 성지라 하였다. “널리 배우며 살펴 묻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판단하고 독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현명함은 곧 정성스러움인 것이다.”라는 『중용』의 뜻을 취한 것이다. 여기에 매 순간 정성을 다하라는 그의 이름과 자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그의 호인 고불(古佛)은 고려시대 아버지 기일에 제사를 지내면서 아버지를 높여 부르던 말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문과에 급제한 사람의 아버지를 존경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런데 고불은 실제 생활에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받들어 이름값을 하였다.

또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에 의하면 그의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신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문’이요, 청백하게 절조를 지킴을 ‘정’이라 한다.”라고 하여 그의 삶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맹사성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소. 내 비록 벼슬이 정승이지만, 만백성이 내 벗이 아니겠소”라며 벼슬이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도 역시 몸을 낮추고 두 손을 모아 인사하며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매우 뛰어났으며 용모 또한 준수하고 예의가 바르고 범상치 않았다. 이는 그가 5세 때에 있었던 최영 장군과의 집 앞 배나무 관련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 사성은 이후 조선 초기 교육입국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유학자 권근에게서 수학하였고,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조선이 건국되어서도 예조 의랑에서부터 시작해 정종과 태종 때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1408년 대사헌이 되었을 때, 지평 박안신과 함께 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남편이었던 평양군 조대림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는 바람에 태종의 노여움을 사 처형을 당할 뻔하였다. 고불은 그렇게 고지식하고 올곧았다. 당시 영의정 성석린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는데, 그는 이웃에 살던 성석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때의 은혜와 변치 않는 마음으로 그의 집 근처에서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갔다.

이후 예조, 호조, 공조판서를 거쳐 1419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432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삼 년 뒤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고불이 물러날 때 세종은 궤장을 하사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달존이라 칭했다.

◆ 아산에 남긴 고불의 발자취

고불 맹사성은 아산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물로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는 그의 발자취를 이곳저곳에서 찾을 수 있다.

고불은 검은 소를 타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검소한 평상복 차림으로 대금을 연주하는 그의 조형물처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의 기본을 지녔고, 항시 청렴결백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비가 새어 의관을 적시는 협소한 집에서 살았고, 행차 때에도 수행을 시키지 않고 평민처럼 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하였다.

고향 아산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뵐 때나 평소 주변을 찾을 때 역시 항상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고 다녔다. 맹사성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검은 소를 반려동물로 삼아 잘 보살피고 평생 동행했다.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다가 굶어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검은 소를 맹사성의 묘 아래에 묻어주고 ‘흑기총’이라 했다.

고불맹사성기념관 앞의 검은소 조형물.
고불맹사성기념관 앞의 검은소 조형물.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 우리나라 최고의 살림집으로 최영 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던 집이다.
아산시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 우리나라 최고의 살림집으로 최영 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던 집이다.
맹씨행단의 옆 모습. 좌측은 세덕사, 우측 큰 은행나무 두 그루는 고불 맹사성이 심은 쌍행수이다.
맹씨행단의 옆 모습. 좌측은 세덕사, 우측 큰 은행나무 두 그루는 고불 맹사성이 심은 쌍행수이다.

맹씨행단은 고려말 최영 장군이 살았던 집으로 현존하는 민가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가치가 높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이 맹씨행단은 맹사성이 직접 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 쌍행수가 아직도 곧게 자라고 있다. 고택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검소함. 구석구석 예스럽고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고 정제된 모습이다. 특히 툇간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과는 달리 따로 열고 밖을 내다보는 데만 쓰는 그래서 소박하게 세상과 소통하였던 작은 창인 눈꼽재기창이 눈길을 끈다. 우리는 이곳에서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마음을 항상 낮게 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고, 공자와 맹자를 닮고자 했던 맹사성이라는 명 정승이며 지혜로웠던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세덕사는 맹사성의 조부 맹유, 부친 맹희도, 맹사성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고, 울타리 밖 오봉산 자락에 있는 구괴정은 조선 초에 정승을 지낸 맹사성, 황희, 권진 세 사람이 세 그루씩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정사를 논했던 정자로 삼상당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지난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구괴정 또는 삼상당이라 불리는 정자로 맹사성, 황희, 권진 세 사람이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정사를 논했던 곳이다.
구괴정 또는 삼상당이라 불리는 정자로 맹사성, 황희, 권진 세 사람이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정사를 논했던 곳이다.
맹씨행단과 구괴정 사이 소나무 숲길.
맹씨행단과 구괴정 사이 소나무 숲길.
아산 맹씨행단 옆에 있는 쌍행수. 고불 맹사성 직접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
아산 맹씨행단 옆에 있는 쌍행수. 고불 맹사성 직접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
아산 신창맹씨비림에 있는 맹씨 가문 효자정려와 효자비.
아산 신창맹씨비림에 있는 맹씨 가문 효자정려와 효자비.
아산 신창맹씨비림에 있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시조비와 「연자루」 한시비.
아산 신창맹씨비림에 있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시조비와 「연자루」 한시비.

한편, 맹씨행단에서 가까운 거리에 신창맹씨비림이 있다. 이곳에는 신창맹씨 세거지비, 신창맹씨 유래비와 효자비, 효자 정려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로 국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시조비와 역사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연자루」 한시비가 했다.

江湖(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흥)이 절로 난다
濁醪溪邊(탁료계변)에 錦鱗魚(금린어)ㅣ 안주로다
이 몸이 閑暇(한가) 해옴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
-맹사성, 「강호사시가」 1수 춘사 전문

이 「강호사시가」는 고불이 이곳 맹씨행단에 살면서 앞에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연을 즐기며 사는 생활을 계절에 따라 한 수씩 읊은 연시조이다. 각 연은 ‘강호에~’로 시작하여 ‘~역군은 이샷다’로 끝나는 구성의 반복과 변주로 자연의 변함없는 조화와 임금에 대한 끝없는 은혜를 드러냈다. 아산 시청공원에도 고불의 동상과 함께 이 시조비가 있다.

◆ 서천에 남긴 고불의 발자취

아산에 ‘맹씨행단’이 있는 것처럼, 서천 축동리에는 ‘맹동’이 있다. 고불 맹사성은 아산 신창 출신이지만 유년 시절을 서천의 한산면 축동리 맹동에서 살았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축동리의 유래비와 마을 정자 옆 은행나무 보호석비 뒷면을 보면 “맹동은 맹사성이 심은 은행나무가 있는 일명 맹정승마을이고, 고려말 조선 초 맹사성이 나라 바뀌는 난을 피해 와서 살았으며, 뒷산에는 당시 지한주사 송신기가 세운(1399) 맹사성과 그 부 희도의 두 효자비가 있다”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그러나 효자비는 은행나무 바로 뒤, 뒷산에 있으나 지금은 대나무숲으로 가려져 동네를 우회해 농로를 따라 비탈길과 밭을 지나가야 만날 수 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 입구에 있는 축동리 마을 유래비. 여기에 고불 맹사성과의 연관성이 설명되어 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 입구에 있는 축동리 마을 유래비. 여기에 고불 맹사성과의 연관성이 설명되어 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고불 맹사성 부자의 효자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고불 맹사성 부자의 효자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신창맹씨선대유허비와 고불 맹사성 부자의 정려와 효자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신창맹씨선대유허비와 고불 맹사성 부자의 정려와 효자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정자와 고불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축동리에 있는 정자와 고불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맹사성은 유년 시절인 5~10세 때에 이곳 축동리에서 성장했다.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 맹사성조에 의하면 “좌의정 맹사성은 정성과 효도가 하늘에 나서 10세에 이미 자식의 임무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아니하고 7일간이나 울며 통곡하였고, 이어서 초분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하니 철이 되어도 풀이 나지 아니했다. 또 잣나무를 무덤 앞에 심었더니 멧돼지가 건들어 시들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사성이 통곡하니, 다음날 멧돼지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이렇게 호랑이까지 감동할 정도의 깊은 효심이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는 효자정려가 내려지고 효자비를 세웠다.

아버지 맹희도 역시 효심이 지극하여 1392년 당시 한산군수와 호장이 ‘효자리’라 칭하고 축동리에 효자비를 세워, 맹사성 효자비가 지금처럼 부친 곁에 나란히 서 있게 된 것이다.

고불 맹사성은 그 후 학식과 덕망이 높고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정치가로 권세보다는 인간다움을 먼저 생각했고, 백성의 삶을 벼슬보다 귀히 여기며, 사대부로서 누릴 수 있었던 호사보다 백성의 배고픔에 더 귀를 기울였다. 이런 그의 정신과 삶은 공직자들의 도덕적 상징인 청백리로 이어지며 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방향까지도 제시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고불 맹사성은 조선을 넘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본받아야 할 훌륭한 인물이다.

방경태 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방경태 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