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고향집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직접 경작할 상황이 되지 못하여 세를 주었다. 수확철에 얼마의 현금과 사과 몇 상자를 받곤 했는데 철도 탁송이나 화물 회사를 통해야 했다. 청량리역, 건영화물 같은 곳에 직접 찾으러 가서 택시로 옮기는 등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지금 같은 골판지 박스며 부직포, 스티로폼, 비닐 등으로 요란스럽지 않은 포장이었다. 대패질이 덜 된 거친 나무판자를 못질한 궤짝에 신문지를 깔고 왕겨 사이에 사과를 넣었다. 요즘은 사과 한 박스에 10∼20과 정도가 담기지만 나무 상자에는 많은 경우 50여 개 이상 들어있어 겨 사이로 손을 휘저어가며 사과를 꺼내곤 했다. 상자를 해체하여 나무판대기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왕겨는 아궁이가 있을 경우 땔감으로 썼으니 그야말로 친환경 완전 소비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사과는 부사 품종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홍로, 감홍, 아오리, 시나노 골드, 섬머킹 그리고 홍옥도 일부 재배된다지만 예전에는 국광과 홍옥을 필두로 골덴, 인도, 스타킹 등 지금은 찾기 어려운 품종이 주를 이뤘다. 고향 과수원에서는 국광이 주품목이었는데 다소 거칠면서 단단한 껍질, 당도와 산미가 적당히 섞인 과육은 지금 부사의 식감과는 다른 풍미를 자아냈다.
사과상자 재질이 바뀌고 품종이 크게 변화하는 수십 년 사이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경험했다. 그나마 크게 바뀌지 않은 것 하나가 국민이 선호하는 이른바 10대 과일 품목이 아닌가 싶다. 사과와 배를 비롯하여 포도, 복숭아, 귤, 참외, 수박, 자두, 감 등은 변함없는데 블루베리가 포함된 듯 싶다. 과일 이름은 그대로라지만 형태와 맛에서 대폭 개량, 진화되기는 하였다. 거봉과 샤인 머스켓, 한라봉과 황금향, 레드향 같은 과일이 비중을 키웠고 기후변화로 과일 재배지역에 큰 변동이 생겼지만 선호하는 과일의 큰 테두리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변동이 적은 셈이다.
이런 전통적인 과일 취향도 나날이 심각해지는 기후변화로 인하여 머지않아 본의 아니게 바뀌리라 전망한다. 더 짧아지고 더 거세어진 장마, 길어진 열대야 등으로 아열대성으로 급속히 옮겨가는 기후이변 현상은 우리 사회의 미덕이었던 뚜렷한 사계절의 특징, 삼한사온 그리고 기후와 풍토에 걸맞는 작물재배 전통이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는 불안을 던져준다. 2100년에 이르면 우리나라 면적 52%가 아열대기후로 바뀐다는데 오래 선호되었던 10대 과일도 이제 아열대, 열대 과일에 자리를 넘겨야 될지 모르겠다.
바나나, 애플망고, 파파야, 패션 프루트, 체리모야 같은 품목이 선호 과일 랭킹에 오를 개연성이 높다. 이 품목 중 상당수는 이미 제주, 남해안 그리고 호남, 충청 지역에서 재배되어 인지도를 높이고 있지만 아직 시설비, 난방비 부담과 병충해 방지와 유통망 구축 등 여러 과제에 당면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들 과일이 고부가가치를 앞세워 고령화농촌 특화작물로 자리 잡아 점차 기후에 적응하면서 지역특화작물로 위상을 굳혀갈 가능성 역시 높다.
동해안의 상징적 수산물 오징어가 서해에서 풍어를 이루어 지난달 충남 신진항에서만 930톤, 118억 위탁고를 올렸다고 한다. 바다를 바꿔 사는 물고기, 재배지역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과일과 농산물, 전통적 온대 기후를 벗어나 해가 다르게 아열대로 향하는 기후위기. 여전히 ‘신토불이’가 머릿속에 각인된 국민들의 걱정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여러 위기 상황을 알리는 경고등 불빛이 깜빡거리는 듯하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