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기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잊고 살 듯이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 하면서도 한 귀로 흘려 보내며 살지요. 이것이 공기와 착할 선(善) 자의 같은 처지라고나 할까요?
선(善) 자에는 ‘착하다’는 뜻과 함께 ‘좋다’의 뜻도 있지요. 그래서 ‘착하다’, ‘좋다’는 뜻의 선(善) 자를 인생의 키워드로 삼고 삶의 지혜로 벤치마킹 해보겠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하게 살라는 것은 ‘양심을 지키며 살라’라고 할 수 있지요. 양심은 도덕적인 마음으로서 이것을 선(善)이라 하고, 비도덕적인 마음 즉 양심에 어긋난 마음을 비양심, 이것을 불선(不善) 또는 악(惡)이라고 인간 사회는 규정하고 있지요.
유학에서는 인, 의, 예, 지를 선본성 즉 양심이라 하고 이기적, 동물적 본능을 악본성 즉 비양심이라 말하고 있지요.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측은지심은 인간의 양심으로서 선 본성이요 이기적 본능에서 나오는 시기, 질투심은 비양심으로서 악본성이라 할 수 있지요. 하늘은 인간 누구에게나 선본성 DNA 즉 양심과 함께 악본성 DNA 즉 비양심을 주셨기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선의 지킬박사가 되었다가 악의 하이드가 되지요. 우리 인간의 마음방은 양심과 비양심이 투쟁하는 곳이요 인간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터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본성 그리고 양심과 비양심 중 어느 것이 더 강할까? 콩밭의 콩보다 잡초가 더 잘 자라듯이 선보다는 악, 양심보다는 비양심의 번식력이 더 강하지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본성 즉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양심을 지키며 살려는 의지가 강하지요.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99%의 양심이 ‘한 잔뿐인데~’라는 1%의 비양심의 유혹에 결국 음주운전을 하게 되지요. 이처럼 99%의 양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1%의 비양심 즉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는 이기적 욕망, 동물적 본능이지요. 모든 범죄는 이기적 욕망, 동물적 본능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요 권세가나 명망가들의 파멸도 1%의 탐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톨스토이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더 한 층의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했지요.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내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남을 위한 착한 일에는 의지가 필요하지요. 음주운전 같이 비양심의 유혹에서 양심을 지키는 데는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장자는 말했지요. ‘하루라도 양심을 지키며 살겠다는 양심 의지가 없으면 비양심의 유혹이 저절로 일어난다.’ 어떠한 비양심의 유혹에서도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양심 의지가 습관처럼 몸에 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 더욱 엄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신독(愼獨) 습관을 가져야 하지요.
선(善) 자의 또 하나의 뜻인 ‘좋다’는 ‘낫다’의 의미로도 해석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인가?’입니다. 더 나은 삶이란 어제보다는 오늘이, 금년보다는 내년이, 전반기 인생보다는 후반기 인생이 더 좋아지는 것 즉 변화와 발전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변화와 발전은 서로 상관관계라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전제되어야 하지요. 녹이 슨 장신구에 아무리 예쁜 칠을 한들 빛이 나지 않는 것처럼 성찰과 반성 없는 변화발전은 소용이 없지요. 더 좋은 삶이란 그날그날의 삶에 구태의연하지 않고 항상 자신의 삶을 성찰, 잘못된 것을 고치고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삶이지요.
삼성오신(三省吾身). 증자의 말로서 ‘나는 매일매일 3가지를 반성하였다.’는 것이지요. ‘나는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하였는가?’ ‘나는 오늘 만난 사람에게 진심을 다했는가?’ ‘나는 오늘 배움에 소홀함이 없었는가?’입니다. 그날그날 한일, 만난 사람, 배움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한다면 그것이 그날그날의 삶에 대한 성찰이요, 반성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곧 변화발전 그리고 나날이 좋은 삶, 더 나은 삶인 선(善)의 삶이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善) 자가 인생의 키워드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