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윗 김지원 대표
연구자 퇴사·전산시스템 부재로
연구기록 사라지는 문제에 주목
웹기반 전자연구노트 ‘구노’ 출시
기업기밀문서공유 시스템도 개발
기록관리서 보안·협업 영역 확대
바야흐로 물 한 방울조차 치열한 경쟁 끝에 흘러가는 시대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익숙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가 진짜 강한 시대, 그 중심엔 중소기업이 있다. 자금, 기술, 신뢰 중 무엇 하나라도 남다른 무기를 가진 기업들만이 오늘을 넘어 내일을 꿈꾼다. 대전시가 선정한 유망 중소기업들 역시 위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스스로 성장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일류경제도시 대전의 든든한 밑거름이다. 금강일보가 직접 만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생존의 법칙을 품은 사람들, 그 치열하고도 따뜻한 성장의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험실에서 시작된 작은 기록이 미래 산업의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 종이 위에 흩어지던 연구노트는 더 이상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증명하는 데이터이며 성공뿐 아니라 실패까지 담아내는 지식의 흔적이다. 레드윗 김지원 대표는 이 지점에서 창업의 길을 택했다. 연구개발 현장의 기록을 디지털로 전환해 보안과 협업까지 확장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그 과정을 블록체인으로 증명하며 연구개발 데이터를 새로운 자산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문과 출신으로 기술 창업에 뛰어든 그의 도전은 이제 글로벌 시장을 향해 있다. 실패마저 증명하는 회사를 꿈꾸는 그의 발걸음은 연구자들의 낡은 노트를 넘어 산업과 사회의 신뢰를 새롭게 쓰고 있다.
◆연구노트에서 찾은 문제의식
연구원들의 하루는 실험과 기록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기록은 오랫동안 종이에 머물렀고 관리 부실로 소실되거나 연구자의 퇴사와 함께 사라지기 일쑤였다. 작은 기업들은 별도의 전산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해 연구 성과가 흩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김 대표는 이 낡은 방식을 바꾸는 데서 출발했다.
“연구노트는 성공뿐 아니라 실패도 남겨야 합니다. 그런데 손으로 쓰는 방식에선 관리가 안 되고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 파악하기 어렵죠. 저희가 만든 건 그 과정을 전자화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입니다.”
김 대표가 2019년 창업과 동시에 선보인 ‘구노’는 연구 기록을 온라인에 모으는 플랫폼이다. 앱 버전 시절에는 반응이 없었지만 웹 기반으로 바꾸자 상황이 달라졌다. 구글 드라이브처럼 데이터를 쌓고 공유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인식되면서 연구자들의 사용률이 급격히 늘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이걸 이중 노동이라고 생각해 외면했어요. 그런데 웹버전으로 전환한 뒤에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기록이 모이고 쌓인다는 가치를 직접 느끼면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비로소 서비스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실패의 기록을 자산으로
그가 연구노트에 주목한 배경에는 연구자들의 자존감 문제도 있었다. 긴 시간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보며 김 대표는 실패의 의미를 되돌려주고 싶었다. 실패의 기록이야말로 다음 성과를 준비하는 토대라는 믿음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석사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굉장히 똑똑한데도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걸 봤어요. 하지만 실패도 자산이라는 걸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의 좌절이 언젠가는 중요한 지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실험은 몇 년 뒤에야 성과로 이어질 수 있고 이 과정은 모두 가치 있는 지식이라는 게 김 대표의 철학이다. 그래서 구노는 성공뿐 아니라 실패도 함께 기록하며 블록체인 기반 위·변조 방지와 국제 인증을 통해 기록을 법적·산업적 자산으로 전환한다.
“연구원들에게 언제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엑셀 정리할 때라고 합니다. 결과가 나오니까요. 저는 그 과정에 실패도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다음 연구의 토대가 되거든요. 실패와 성과가 함께 기록될 때 비로소 연구의 전모가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보안과 협업으로 확장
레드윗은 연구 기록 관리에 그치지 않고 보안과 협업 영역으로 사업을 넓혔다. 스트롱박스는 기업 간 협력 과정에서 문서를 안전하게 주고받도록 만든 서비스다. 연구개발 성과가 외부와 공유되는 순간에도 신뢰와 통제가 유지되도록 설계된 것이다.
“보통은 문서를 PDF로 주고받는데 그게 어디까지 퍼지는지 알 수 없죠. 스트롱박스는 링크 기반으로 열람 기한과 보안 조건을 설정할 수 있고 누가 언제 열람했는지도 추적이 가능합니다. 덕분에 협력 과정에서도 기밀이 지켜진다는 확신을 줄 수 있었어요.”
스트롱박스는 업로드 즉시 블록체인 인증서를 발급하고 비밀유지계약(NDA) 동의 절차까지 결합해 기업 간 기술협력의 신뢰도를 높인다. 외부에 전달된 문서가 언제, 누구에게 열람됐는지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어 기밀 유출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결국 저희의 목표는 연구개발 데이터를 하나의 자산으로 만드는 겁니다. 보고서를 자동으로 작성하거나 특허와의 유사성을 분석하는 서비스로 확장해 기업이 그 가치를 돈으로 바꿀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데이터가 경쟁력이 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문과 출신 창업자의 도전
그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이다. KAIST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공학의 언어와 개발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끝내 자신만의 강점으로 바꿔냈다. 낯선 영역을 헤매던 경험이 오히려 융합적 시각과 설명력으로 이어진 셈이다.
“개발자와 소통하는 게 제일 힘들었죠. 이해가 안 되면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그래야 밖에서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투자자들을 설득할 땐 오히려 강점이 됐습니다. 기술을 외부의 언어로 풀어내는 게 제 역할이자 경쟁력이 된 것이죠.”
김 대표의 도전은 제도적 성과로도 이어졌다. 레드윗은 2023년 특허청으로부터 민간 최초 영업비밀 원본증명기관으로 지정돼 법적 공신력을 확보했다. 이는 문과 출신 창업자가 기술·법률·제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낸 상징적인 사례다.
“처음 원서를 낼 때도 로또처럼 내봤던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인재가 필요하다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스스로 겁먹었던 거죠. 결국 제가 희귀한 인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한계는 남이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씌우는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실패를 증명하는 회사로
현재 레드윗은 15명의 직원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서울 사무실은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고 향후 인공지능(AI)과 대규모 언어모델(LLM) 기술을 접목해 연구개발 데이터를 가치 있는 자산으로 전환하는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런 기술이 진짜 자산이 되려면 돈이 돼야 합니다. 실패 과정과 노하우가 결국 돈이 되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하고, 그 안에서 서비스는 계속 변할 수 있죠. 그래야만 연구개발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기업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동창업자와 연구진 다수가 KAIST 출신인 만큼, 연구 환경과의 밀착성을 고려해 본사를 인근에 뒀다. 현장 중심의 개발 체계를 유지하면서 점차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투자와 정부 과제를 통해 안정적인 성장 기반도 갖췄다.
“우리의 비전은 단순해요. ‘너의 일을 증명하자’입니다. 실패든, 성과든 네가 한 일이 가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증명이 곧 신뢰로 이어지고 결국 산업과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될 거라 확신해요.”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