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에 뛰어난 송인, 당시 사대부의 비문 써줘

묵음재 입구 신도비
송질의 손자 송인(宋寅,1516~1584.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庵), 녹피옹(鹿皮翁) 아버지 송지한(宋之翰)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은 중종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 최고관직으로 군무를 총괄했으며 대개 종실에서 겸하는 경우가 많은 정2품)을 지냈다.

송인은 1526년 중종의 셋째 서녀(庶女)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졌고, 명종때는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儀賓府), 충훈부(忠勳府), 상의원(尙衣院) 등에서 요직을 지냈으며 도총관(都摠管,정2품)에 이르렀다.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이황(李滉), 조식(曺植), 이민구(李敏求), 정렴(鄭磏),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교유했다.

특히 글씨에 능하여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楷書)를 잘 썼는데, 이황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당시 궁전의 편액과 사대부의 비명(碑銘)은 대부분 그가 썼다고 한다. 저서로 이암집이 있다.

작품으로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 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영상한효원비(領相韓效元碑), 남원의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부안의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이 있고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록된 것만 35점에 이른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송문림(宋文琳,1409~1476)은 성종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냈다.

송언신(宋言愼, 1542~1612(중종~광해군), 15세, 호는 호봉, 시호는 영양, 정가공파(正嘉公派))은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1577년 알성시 문과(성균관에 임금이거둥한후 보던 대과)에 급제하고, 네번의 암행어사를 지냈다.

1591년에는 대사간(大司諫, 왕에게 간하던 사간원의 정3품),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으뜸 정3품)을 거쳐 도승지(정3품 왕의 비서실장)등을 역임했다.

1606년에는 최고의 명예라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정2품문형)을 두 번이나 지냈다. 또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 국방장관)와 이조판서(정2품장관)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1년 관찰사(觀察使;종2품감사, 도지사)로 있을때 처음으로 족보(族譜)를 만들었다고 한다. 송언신은 1476년 11월 15일 경기도 광주 반곡에서 생을 마감했다.

송언신 영정은 1585년 송언신이 자식이 없어 10촌형의 둘째아들 송준(宋駿)을 입양할 것을 예조에서 허가한 문서인 ‘예조입안’등과 함께 보물 제941호에 지정되어 경기도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재궁종회는 경기도 군포시청뒤 현충탑에 오르는 길에 있는 여산송씨 재실이다.

이곳에는 송서(宋瑞, 정가공파파조)의 증손인 한성판윤(정2품서울시장) 송복산(宋福山,1390~1467)의 묘가 있다.

그의 아들 송숙기(宋叔琪,1426~1489)가 복거한후 자손들이 세거하면서 600여 년 가까운 전통을 가진 유서깊은 종중이다.

경기도 군포시의 이곳은 승지골, 쟁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모두 여산송씨 종중과 함께 전해져 온 지명이다.

선조의 묘역이 있는 골짜기 이름도 송복산의 후손 송겸이 거주했고, 152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당상관)를 역임해 승지골이라 불렸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