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분에서 동지까지 석 달 남짓, 그 중반 무렵에 다다랐다. 해가 비교적 일찍 지고 어둠이 깃드는 시간이 빨라지는 이즈음 문득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 낮과 밤의 경계를 이루는 애매한 시간, 낮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딱히 밤이 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을 일컫는 표현으로 프랑스 전래 관용어에서 유래하였다. 목동들이 하루 방목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 저만치에 어슴푸레 보이는 실루엣이 나를 도와주는 개인가 혹은 양이나 염소, 소떼를 해치러온 늑대인가를 명확히 식별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판단이 잘 서지 않고 긴가 민가 머뭇대는 그런 상황이 어디 양치기에게만 해당될까. 삶의 고비 고비, 판단과 결심을 망설이게 되고 스스로의 인식과 결단이 멈칫하면서 주저하게 되는 경우를 경험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상황은 잦아지고 자연스럽게 일종의 두려움이 뒤따르기도 한다. 더구나 사회망,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자주 ‘개와 늑대의 시간’과 마주친다. 이성보다는 감정, 확신보다는 주저, 결단보다는 선택의 망설임 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모순과 갈등의 경험.... 개와 늑대처럼 외양이 비슷하긴 해도 결국 분간할 수 있는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사람 사이로 옮겨가면 구분은 용이치 않다.
이럴 때 이런저런 생각을 접어두고 시 한 편을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읽어본다. 개와 늑대를 혼동하는 황혼 무렵, 어수선함에서 잠시 벗어나 내면의 여정으로 접어들어 본다.
이때는 여인의 얼굴처럼 온화한 저녁/ 엄동설한 속 피어난 기이한 저녁 / 박명 위에 떠도는 감미로움은 / 마음의 상처 위에 가느다란 실 되어 내려온다.// 천사 같은 초록빛... 핏기 잃은 장미꽃.../ 멀리 부드러운 개선문이 흐릿해지고/ 푸르스름한 서녘에 내리는 밤은/ 고통스러운 신경에 그지없이 부드러운 안식을 부어준다.// 검은 바람, 납빛 안개의 달에/ 가을 낡은 꽃잎들은 떨어졌고/ 반음계의 아름다운 하늘 빛깔은 마지막 음계를 지워간다.// (.....)
- 알베르 사맹, ‘저녁’ 부분
알베르 사맹 (1858∼1900)은 ‘가을과 황혼의 시인’이라고 불린다. 조락의 계절 가을, 해가 질 무렵 ‘개와 늑대의 시간’이 자아내는 몽환의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특히 재능을 나타냈다. 그가 쓴 ‘삶의 위로’로서의 시작품이 20세기를 건너 21세기로 넘어왔다. 얼핏 시대에 뒤지는 고루한 서정 토로, 애상조의 내면 고백으로만 보기에는 예민하면서 천의무봉한 감성의 멜로디가 녹진하고 애잔하다. 개와 늑대를 구분하느라, 예민해진 감성이 세파에 휩쓸려 바래지고 무디어질 때 이런 시를 읽으면서 충전되고 내면이 촉촉해졌으면 좋겠다. 모두들 개와 늑대를 구별하러, 내게 무슨 손해나 위해가 닥칠까 경계하며 크게 눈을 뜨고 목청 높이는 바쁘고 메마른 세파에서 이런 잔잔한 무상(無償)의 시구가 주는 여운은 자못 깊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