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조사, 국내 연구자 43% “3년 내 이직 고려”
20·30은 70% 달해…금전적 요인 등 복합적 작용
성과기반 임금체계, 기회보장·연구환경 혁신 필요

국가 경제발전의 핵심 기반인 과학기술 인재의 해외 유출 경향성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과계열 상위권 학생의 상당수가 의료 분야로 진학하고 이공계를 선택한 우수 인재들도 해외로 눈을 돌리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는 거다. 특히 미국으로의 진출이 활발한데 미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이공계 박사 인력 규모는 2010년 약 9000명에서 2021년 1만 8000명으로 두 배나 늘었고 우리나라 순유출 규모도 2015년 이후 바이오와 ICT 부문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국내 이공계 주요 5개 대학 출신 인력이 순유출의 47.5%(2004~2024년 평균)를 차지하고 있다. 금전적 요인(성과보상)과 연구환경 등이 이 같은 흐름을 형성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무너지는 경제성장의 근간
우리나라 이공계 인력은 지난 수십 년간 양적으로 꾸준히 확대됐지만 우수 인재들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연구개발 인력은 인구 1만 명당 약 170명으로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지만 이과계열 상위권 학생의 의대쏠림 현상은 심화되고 기술창업 성과는 미국·중국 등 주요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 또 전공별 인력 공급과 산업계 인력수요 간 미스매치로 인해 인적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저하되는 문제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국내 기업·연구기관의 석·박사급 연구자 2694명(국내 체류 1916명, 해외 체류 77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내 체류 응답자의 42.9%가 “향후 3년 이내 해외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중 5.9%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거나 인터뷰 등을 진행 중”이라고 응답했다.
특히 20~30대의 젊은 인력들은 해외 이직을 원하는 비중이 70% 수준으로 매우 높다. 종사 분야별로는 바이오·제약·의료기기(72.4%), IT·소프트웨어·통신(44.9%)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타 국가에 비해 기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되는 조선·플랜트·에너지(43.5%) 부문에서도 40% 이상이 3년 내 이직을 고려하고 있으며 7.1%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이직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응답집단은 주로 30~40대이며 이들은 대학교나 중소기업(스타트업 포함)에 소속된 연구개발 종사자 및 교수로 구성돼 있다.
국내 체류 연구자들이 해외 이직을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금전적 요인(66.7%, 1∼3순위 복수응답)이다. 국내 이공계 인력의 절반 이상은 연봉 수준에 대해 ‘불만족’ 또는 ‘매우 불만족’이라고 응답한 반면, 해외 인력은 이 비중이 20% 미만에 그쳤다. 분야별로는 바이오·제약·의료기기, 전기전자·반도체, IT·소프트웨어·통신 순으로 불만족 비중이 높다. 특히 전기전자·반도체와 자동차·모빌리티 분야는 국내 평균 연봉이 높은 편임에도 석·박사급 인력들은 기업 성과에 비해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다. 근무연수별 평균 연봉 추이를 보면 국내 이공계 인력의 평균 연봉은 근무연수에 따라 완만하게 상승하는 반면, 해외 인력의 평균 연봉은 경력 초반 급격히 증가한 뒤 근무연수와의 상관관계가 사라진다. 해외 체류 연구자의 경우 13년차에 36만 6000달러로 최고점이 찍히지만 국내 연구자의 경우 19년차에 12만 7000달러로 정점을 찍고 하락한다. 절대적인 연봉 차이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근무연수에 비례하는 보상구조와 초기 경력 기회의 격차가 젊은층의 해외 근무 선호를 높이는 주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은은 분석했다.
물론 이공계 인력의 해외 이직은 단순히 금전적 요인으로만 설명되진 않는다. ‘연구생태계 및 네트워크’(61.1%), ‘기회 보장’(48.8%) 등 비금전적 요인을 해외 이직의 이유로 지목한 응답률도 높다. 도 현직장에 대한 만족도 역시 연구생태계 및 네트워크와 근무여건 항목에서 국내외 간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 아울러 응답자의 81%가 이공계 인력의 해외 이직을 “심각하다”고 평가했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시급한 과제로 ‘연구환경 개선’(39.4%)을 ‘과감한 금전 보상’(28.8%)보다 더 중요하게 꼽았다. 해외 이직은 단순히 급여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연구환경의 질적 수준과 경력 발전 기회의 제약이 인력 이동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방증이다.
◆R&D 생태계 혁신 필요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와 분석 내용을 담은 ‘이공계 인력의 해외유출 결정요인과 정책적 대응방향’ 보고서는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한 금전적 보상체계 혁신과 R&D 투자 실효성 강화, 기술창업 기반 확충 및 전략기술 개방을 통한 혁신 생태계 확장을 대응정책의 핵심 방향으로 제시했다.
우선 보상체계와 관련해선 기업·기관이 획일적 연공형 임금구조에서 벗어나 성과·시장가치에 기반하는 유연한 임금·보상체계로 전환하고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적투자 세액공제의 실효성 강화, 핵심 인력에 대한 소득세 감면 제도의 확대·개편 등 과감한 정책적 조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R&D 투자의 실효성 강화와 관련해선 R&D 투자 규모의 확대 못지않게 인재순환형(brain circulation) R&D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구개발 분야의 허리 역할을 담당하지만 경력개발 기회는 제한적인 젊은 석사급 인력들의 해외 이동 의향이 매우 높은 점을 감안해 이들이 국내에서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예측가능한 경력 트랙 정비, 해외 연구기관·연구자와의 교류 강화, 첨단 인프라에 대한 접근성 제고 등을 통해 R&D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해외 경험 인력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조직 운영 구조와 유인 체계(겸임·정년연장 등)를 마련해 축적된 경험과 역량을 갖춘 석학들이 국내 연구생태계로 환류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이 보고서는 기술창업의 경우 이공계 인재가 의료 등 고소득 전문직에 견줄 만한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성취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경로인 만큼 정부가 초기 창업 리스크를 흡수하는 선도적 투자자이자 촉매자로서 역할을 강화해 인공계 인재들이 창업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