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니스트·문학박사
소설가 이문구는 보령 출생으로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과 많은 작품에서 해학과 풍자를 충청도 방언을 통해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는 서민의 일상과 충청도의 말맛을 살린 우리나라 농촌문학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서 보령뿐만 아니라 우리 충청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그러나 보령을 문학 산책하다가 보면 소설가 이문구는 그가 남긴 문학적 울림과는 다르게 그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관촌마을과 관촌수필 길이 조성되어 있으나 아직 변변치 못하고, 이문구 작가의 집필실은 보령시가 매입했으나 제대로 활용을 못 하고 있으며, 보령문학관에서는 ‘한국 문학사의 빛나는 거목’이라는 제하에 보령 출신 임영조, 이문희, 김성동, 최상규, 권영민 등을 거론하고 있으나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이곳 출신 대표 소설가 이문구는 없다.
누가 봐도 자연스레 있어야 할 자리에 너무도 선명한 공백이다. 그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존중에서 비롯된 의도적 결여요,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부재였다. 또 그것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유언을 둘러싸고 형성된 조심스러운 침묵의 결과이기도 하다.

먼저 들은 소식은 이렇다. “내 이름으로 문학비나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 “유골은 관촌마을 뒷산 소나무 숲에 뿌려 달라.”는 작가의 유언과 그 유지를 받드는 유족들의 단호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문학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추모비도 전시도 그 어떤 기념 사업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인의 유언은 작가의 자율성이며, 유족들이 유언을 지키는 일은 도덕적·가족적 의무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관은 그렇게 문을 닫았다고 한다.
반면에 지자체와 문학계의 입장은 다르다. 문학관과 생가 복원은 작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지역의 문화 자산을 가꾸는 일이며, 후대의 문학도를 위한 기억의 터전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이문구의 문학적 가치는 개인을 넘어 공적인 자산이다. 후대가 기억할 최소한의 문학적 장치는 필요하다.” 따라서 보령예술의 전당 내에 이문구 문학관 조성은 물론이고, 그의 집필실과 생가를 복원해 그를 기리는 사업 계획도 추진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모든 것이 지금은 무산된 상태이다. 그곳 공간들은 지금 문단을 대표하던 한 작가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거나 인생무상을 드러내는 또 다른 공간이 되고 말았다.
개화예술공원과 성주산 화장골 시비공원에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라는 「산 너머 저쪽」 시비만이 그가 이곳 보령의 문인임을 알려 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안고 마지막 답사지인 화암서원으로 향했다. 화암서원은 이문구와 같은 한산 이씨 종중의 선조인 토정 이지함을 배향한 서원으로 그의 조부가 이곳에서 도유사로 일했고, 어린 이문구가 한학을 익히던 공간이다. 화암서원 앞에는 청천저수지가 잔잔히 펼쳐져 있고, 둘레길과 산자락은 꽃동산처럼 화사했다. 가벼운 바람, 청아한 물빛, 평화로운 풍경, 마치 모든 갈등과 논쟁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듯했다.

이문구는 어쩌면 ‘기억되지 않는 방식의 기억’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굳이 기념비나 전시실이 없어도, 그가 걸었던 관촌마을 길과 저수지, 벚꽃과 솔숲은 이미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문학관이었다. 이곳 방문객들은 문학관이라는 건물이 없어도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이문구와 그의 문학을 어떤 형태로든 되살려서 회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구를 기억하려는 마음은 유족도 지자체도 독자도 모두 진실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이 진실이 언젠가 하나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이문구 문학은 더욱 온전히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 방식이 문학관일지 생가 복원일지 혹은 지금처럼 조용한 기억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이문구 문학 산책을 통해 문학은 건물로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러기에 이문구 문학 산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의 이름이 사라진 공간 속에서 오히려 그의 문학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문학은 이렇게 남기지 말라는 이의 뜻 속에서도 때로는 생명력 있게 살아있는 것이다. 관촌마을의 바람과 화암서원의 고요는 조용히 그가 남긴 문학을 기억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기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