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양기, 고려 공민왕이 귀국할 때 노국대장공주 수행하여 왔다가 정착
양씨(楊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시조인 양기(楊起:시호 충헌)는 원나라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고려때는 종2품 품계로 후에 광정대부로 바뀌고 정2품으로 격상됨)로 중서성(中書省)의 정승(政丞: 다른 기록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명칭이 변경된 도첨의부의 시중을 지냈다고 함)으로 있을 때인 1349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공민왕비)와 결혼한 고려태자 령전(공민왕)이 왕위에 즉위차 1351년 12월 25일(고려사 권38.2) 환국할 때, 노빈도령(魯嬪都令)으로 공주를 배종(陪從: 지체 높은 사람을 모시고 따라감)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청주양씨(淸州楊氏) 대종회 기록에는 시조인 충헌공(忠憲公) 양기(楊起)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서기 1351년 12월 25일로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고려 충정왕(忠定王) 3년이 정설이며, 지금(2011년 기준)으로부터 약 660여년 전이라고 한다.
시조 양기는 개경에 41년간 정주(定住)하다 1392년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그의 일족이 한양으로 옮겨 왔으나, 2세인 아들 6형제 중 일부는 잔류했다고 한다.
시조 양기(楊起, 호는 암곡(巖谷))는 고려에 들어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백관을 통솔하던 종1품 정승으로 1362년(공민왕 11)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면서 문하시중이 첨의정승으로 바뀜)에 올랐으며, 만백성의 적폐(積弊)였던 세공(稅貢: 전세(田稅)와 공부(貢賦) 등, 고려때 부세(賦稅)의 포괄적인 의미이며, 동녀 5000인,준마 3만필,비단 3만동,저포 6만필 등)을 삭감해 그 공훈으로 나라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고려때 정1품 품계)의 품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1품 품계)로 상당백(上黨伯: 상당은 지금의 청주 백은 오등봉작 중 세번째 작)에 봉해져, 본관을 청주로 해 청주양씨(淸州楊氏)의 시조가 됐다.
그 후 다시 벽상삼한창국공신(壁上三韓昌國功臣)에 올라 청백리에 녹선됐으며, 1394년 92세로 천수를 누리다 서거해 나라에서는 그에게 시호(諡號)를 충헌(忠憲)으로 내렸다.
조선시대에 청주양씨는 서기1455년(단종3)까지 63년간 큰 치적을 쌓아가고 있었으나, 이른바 단종 선위(端宗禪位)의 상잔으로 기억된 을해난(乙亥亂)의 회오리 속에 충헌공의 현손 혜빈양씨(惠嬪楊氏)가 연루돼 당사자가 참형(斬刑)됨은 물론 일족이 서울을 뒤로 하고 전국으로 이산하는 비운을 맞게 되며, 대부분의 후손이 경기 황해도를 중심으로 세거했다고 한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계기로, 씨족 대이동을 겪어 남·북 각지에 이주를 하게 됐으며, 세거지 별로 남·북에 6대 4정도의 비율로 산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혜빈양씨(惠嬪楊氏,?~1455년 11월 9일,또는 1464년)의 아버지는 양경(楊景)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후(楊厚)가 혜빈양씨의 숙부이다.
세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1414년(세종 23)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동궁인 노산군[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자 세종은 혜빈 양씨를 택하여 어린 동궁을 보살피게했다. 이에 혜빈 양씨는 정성을 다해 단종을 보살폈고 이러한 지극 정성은 단종의 성덕(聖德)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455년(단종 3) 혜빈 양씨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옥쇄를 거두려고 하자 “옥쇄는 국왕의 중보(重寶)이다. 선왕의 유훈(遺訓)에 ‘세자와 세손이 아니고는 전할 바가 아니라’ 했기에 비록 내가 죽더라도 내놓지 못하리라”고 훈유(訓喩)하여 말하다가 그날로 죽음을 당했다.
혜빈 양씨의 3남인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도 운검(雲劒)을 갖고 입시하다 동시에 죽음을 당했다. 1남인 한남군(漢南君) 이어(李王於)는 경상남도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 3) 금성군(錦城君)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화를 입고 적소에서 병사했다.
왕이 죽으면 후궁은 궐을 나가야 했다. 그러나 혜빈양씨(惠嬪楊氏)는 어린 단종을 보육(保育)했기 때문에, 세종의 사후에도 궐내에서 생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