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 칼국수만 먹어도 마냥 좋다는 사람들이 있다. 과장 아니냐고 타박해야 부질없다. 예찬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칼국수에 푹 빠져 사는 마니아들이 대전 여기 저기서 손을 들테니. 어머니의 젖 내음같은 아련한 혓끝의 기억을 잡고 칼국수에 대한 추억과 애환을 곁들여 먹는다는 사람도 있다. 착한 가격에 골라먹는 재미까지, 칼국수의 묘수는 무죄다. 대전에서 내로라하는 칼국수 마니아들을 만나 봤다.
결론은 ‘칼국수 도시 대전’의 걸어다니는 간판이라고해도 무방한 느낌표. 편집자
---------------------------------
맛·의·화·신

생각만으로도 행복 하루 두끼도 환영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에 중독됐죠
“하루 세 끼 칼국수를 먹을 수는 없지만, 하루 두 끼는 환영입니다”
조항입(53·중구 태평동) 대전시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은 칼국수 먹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진정한 칼국수 애호가다. 칼국수 집 위치는 기본, 인테리어와 분위기까지 기억해 낼 정도다.
지난 1988년 직장생활을 시작한 조 사무총장은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점심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의 폭이 좁았다”며 “지금이야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음식이 다양화·고급화됐지만, 그 당시 가까이에 있고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게 칼국수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직장이 칼국수 본토, 중구 대흥동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터다.
점심을 거의 칼국수로 먹다보니 그 맛에 중독돼 지금까지 즐기고 있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자신처럼 칼국수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임까지 만들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한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아는 맛집을 소개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일종의 칼국수 집 순례 형태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번개모임 연락을 기다리게 됩니다. 오늘은 어떤 칼국수를 맛볼 수 있을까 설레지요”
번개모임은 칼국수를 맛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단다. 자체 품평을 거쳐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맛이 없으면 그 곳을 소개한 당사자가 다시 맛집을 찾아내야 하는 벌칙성 수고로움이 뒤따른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머는 법.
“직원들에게 회식장소 상호와 위치를 알려주니 다들 낙담해 하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하지만 회식이 끝나고 난 뒤에는 직원들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흐뭇했죠”
회식자리는 으레 ‘삼겹살에 소주한잔’을 생각하던 직원들은 칼국수 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둥했을 것이다. 서로 살갑게 붙어 앉아 수육에 세상사를 안주삼아 즐기다 보니 전과는 다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는 것이 소문난 칼국수 마니아의 판단이다.
어디 에피소드가 이것 뿐이랴.
“겉모습은 폐허에 가깝고 실내를 들어서면 마치 바퀴벌레라도 나올 법한 칼국수 집이 있었습니다. 담이 큰 여직원들도 그곳으로 식사하러 가자고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요”
사물을 겉만보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조 사무총장에겐 그 곳만큼 맛있는 칼국수 집이 없었다니 말이다. 면이 나오기 전까지 두부탕을 안주로 술 한 잔, 칼국수가 나오면 그 것으로 또 한 잔, 면을 다 먹고 나면 마지막으로 국물에 밥까지 말아 비벼먹게 돼 폭식을 유발하는 집이라고 입에 침이 마른다.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하고 있는 조 사무총장은 ‘칼국수가 적’이라고까지 했다. 신선한 채소를 자주 먹고 면류를 피하라는 충고를 허투루 들을 수 없어 목하 고심 중. 그 만큼 칼국수를 멀리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무엇이라고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이 있습니다. 맛있어서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남기기 아까울 정도로 강한 맛이죠”
과연 그가 칼국수를 끊을 수 있을까? ‘아니올시다 ’
--------------------------------
힐·링·푸·드

사회 초년시절 힘들때 위로해주던 위안의 맛
몸·마음 지친다 싶으면 '무조건 무조건이야'
사회 초년병으로 성장통을 겪은 이지선(29·여·서구 월평동) 씨에게 칼국수는 치료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들였을 때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칼국수를 통해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동료와 여유를 얻었지요”
우왕좌왕하며 힘들어 할 때 회사 동료가 손을 내밀었다. 단순한 식사 제의였지만 그녀에게는 한줄기 빛이 됐다.
어린 시절 음식투정이 심했다는 이 씨는 어머니를 통해 칼국수를 처음 접했다.
편식이 심한 딸을 위해 어머니는 사랑을 담아 밀가루 반죽을 하고 육수를 만들어 따뜻한 칼국수를 만들었다. 호기심에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해보기도 하면서 뿌듯함을 고명처럼 얹어 먹었다. 지금은 그 칼국수 한 그릇이 어머니의 사랑이었음을 느낀다.
그 후로 면 요리를 즐기게 됐다는 이 씨는 요즘 맛집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면요리의 최고봉은 칼국수.
“다른 면 요리에 비해 식감이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게 이유다.
“칼국수는 한 가지의 특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멸치칼국수, 바지락칼국수, 황태칼국수, 얼큰이칼국수, 비빔칼국수, 샤브칼국수 등 다양한 종류가 있어 때에 따라 골라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착한 가격에 넉넉한 인심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죠”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변신을 시도한 칼국수가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며 친 서민음식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한번은 친구들과 급히 여행을 떠나게 됐다는 이 씨는 “미처 음식재료를 준비하지 못해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중 생각난 것이 바로 칼국수였다”고 했다.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난 후 가벼운 추위를 느낀 일행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간단한 칼국수였지만,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휴식이 필요할 때 어김없이 칼국수 집을 찾는다니 그에게 칼국수는 힐링이다.
“칼국수의 그 맛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뜨거운 욕조에 앉아서 얼음물을 마시는 것 같은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라고 할까요”
지선 씨의 칼국수 사랑이 ‘왜 칼국수에 열광하느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이 아닐까 싶다.
--------------------------------
향·수·한·입

외갓집처럼 정감가는 구수한 맛 못 잊어
추억 가득한 칼국수 사랑 유통기한 없죠
“맛집이라면 직접 발품을 팔아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손유일(58·대전 유성구) 한남대 대외협력팀장은 걸어 다니는 음식백과사전이다.
소문난 미식가지만 특히 면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손 팀장은 대전에서 유명한 칼국수 집의 위치며 주 메뉴, 맛이 어떤지 줄줄이 꿰고 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자취를 했다. 털어도 먼지만 나던 주머니 덕에 조석을 밀것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질릴 법도 하건만 그의 칼국수 사랑은 유통기한이 없다.
“면 요리와 개인적으로 잘 맞고 먹기 편해 순환이 잘된다”고 입을 연 손 팀장은 “너무 자주 먹다보니 집사람과 작은 다툼이 일기도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홍보팀에서 대외협력팀까지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손 팀장은 대전지역 맛집의 역사를 꿰고 있다.
지난 1981년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칼국수를 자주 먹었단다. 진로집, 신도칼국수, 강릉칼국수, 깡장집, 대선칼국수 등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칼국수 집 이름을 열거하던 손 팀장은 “퇴근 후 격의 없이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하루의 노고를 칼국수 집에서 풀었다”며 “술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가격에 비해 양도 많고 맛까지 좋은 칼국수가 그에게는 최고의 안주이자 최고의 보약인 셈이다.
술자리를 파하고 나면 손 팀장은 잠자리 들기 전 꼭 면 요리를 먹는다. 그냥 잠이 들면 다음날 숙취로 고생을 하는데 얼큰한 국물에 국수를 먹고 자면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회식자리도 칼국수 집을 자주 권한다고 한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누구와 먹든 모두가 ‘잘 먹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해온다고. 그것은 칼국수가 어느 누구에게나 입맛에 맞는 대중적이고 후회하지 않는 맛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품평이다.
칼국수의 맛에 대해 손 팀장은 “외갓집처럼 정감이 가는 구수한 맛”이라며 “우러나는 육수와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따뜻하고 그윽한 맛”이라고 입맛을 다졌다.
추억 속 외할머니가 홍두깨로 오래 빚으면 빚을수록 끈기 있고 차지는 밀가루 반죽과 정성스럽게 육수를 만들어 주던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요즘도 맛집이라면 직접 찾아가 본다는 손 팀장은 어쩌면 그 맛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추억을 더듬는지 모른다.
조길상 기자 pcop@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