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한 강백년
소현세자비 강빈 무죄상소로 사직
강자위(姜自渭)는 강문한(姜文翰, 1464년, 동지공), 강문필(姜文弼(창암공), 강문익(姜文翼, 사직공)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중 장남인 강문한(姜文翰)이 15세기 말에 온양에서 회덕의 신탄진 한절구지(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한사곡) 일대로 이거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회덕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강문한(姜文翰)이 회덕에 입향(入鄕)한 것은 회덕이 그의 처향(妻鄕)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문한의 부인은 광산김씨 김치기(金恥其)의 딸인데 강문한의 묘소가 회덕 석봉리(대덕구 석봉동)에 있는 데서 짐작된다.
이 당시의 혼속(婚俗)은 이른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강문한 역시 그의 처가 근처에 와서 살다가 이곳에 묘소를 정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강문한은 6남 4녀를 두었는데 이 중에서 강림(姜琳), 강린(姜璘), 강침(姜琛)의 세 아들이 크게 번창했다.
장남인 강림(姜琳)은 진사로서 왕자 사부를 지냈고, 삼남인 강린(姜璘)은 좌승지(左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를 역임했으며, 5남인 강침(姜琛)은 연산현감을 지냈다.
이들 진주강씨들은 이후 강문한의 손(孫), 증손(曾孫) 대(代) 이른바 12竹)의 성세(盛勢)가 이루어진 16세기에는 그 족적 기반이 확고하게 되었고, 17세기에는 강학년(姜鶴年), 강백년(姜栢年) 등 저명한 유학자를 배출하는 등 가문이 크게 번성하여 회덕의 대족(大族)으로 성장하였다.
1672년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회덕향안 서(懷德鄕案 序)에서 이른바 “남송북강(南宋北姜)”이라 하여 진주강씨가 은진송씨에 이어 회덕에서 두번째로 많은 대성씨족(大姓氏族)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1672년의 중수본향안(重修本鄕案)에서도 입증된다.
"강세황 할아버지 강백년
소현세자비 강빈의 무죄 상소 하였다가 사직
만년에 충북 진천에서 활동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강백년(姜栢年, 1603~1681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峰), 한계(閑溪), 청월헌(聽月軒), 시호는 문정(文貞))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회덕 자운골, 잔골)에 태어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文臣)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강인(姜璘)이고,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이다. 아버지는 강주(姜籒)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응서(金應瑞)의 딸이다. 부인은 김광수(金光燧)의 딸로 안동김씨이다. 아들은 강선(姜銑, 1645(인조 23)∼1710(숙종 36), 자는 자화(子和), 강운상(姜雲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주(姜籒)임)과 강현(姜鋧)을 두었다.
강백년(姜栢年)은 1627년(인조 5) 문과(文科, 대과) 을과에 급제하고 사간원의 정언(正言, 임금에게 간언하던 정6품 학자)과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장령(掌令, 정4품 부장검사)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비 강빈의 옥사가 일어나자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던 종5품(從五品) 관직으로 정원은 2명, 1463년(세조 9) 11월 홍문관을 새로 설치했을 때 없어졌다가 1470년(성종 1)에 예문관을 증설할 때 다시 두었음)로서 강빈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했다 사직됐다.
그해 문과(文科, 대과) 중시(重試, 이미 급제한 사람이 합격하면 당상관을 줌)에서 장원해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당상관)에 올랐고, 이듬해 상소해 전국에 걸쳐 향교를 부흥케 했다. 1648년(인조 26)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정3품)으로서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어줌)을 상소하였다가 청풍군수(郡守, 종4품 수령)로 좌천됐다. 1653년(효종 4) 승정원의 좌승지(左承旨, 정3품)에 오르고 충청도관찰사(觀察使, 종2품감사)와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60년(현종 1) 예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 동짓달에 중국에가던 사신의 두번째 서열)가 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0년(현종 11) 이후 승정원의 도승지(都承旨, 정3품 왕의 비서실장), 이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 등을 역임한 뒤 현종이 승하하자 왕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