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가문 지키며 품위있는 선비생활즐겨
강첨 비롯한 종형제 12명 '세정 12죽'이라 불러
강첨(姜籤, 1559년(명종 14)~1611년(인조 12), 자(字)는 公信(공신), 호(號)는 추월헌(秋月軒))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회덕 잔골(자운리, 대덕구 석봉동)에서 효자로서 영의정에 추증된 강운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6년(선조 9)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1591년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보던 정기과거)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 외교문서 짓는 일을 하던 관아)의 정자(正字, 정9품)가 됐다. 1592년 병조의 좌랑(佐郞, 정6품 주무관)으로 있을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경상도의 운량어사가 돼 군량 조달에 힘썼다. 1595년 사헌부의 지평(持平, 정5품 검사)이 됐고 이어 사서(司書, 세자시강원의 정6품으로 설서 위)를 겸하였으며, 경연(經筵, 경연청에서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 하던 것)에 나아가 ‘주역’을 강론했다. 1596년(선조29) 경상도 체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돼 일본의 재침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이어 교리·장령 등을 거쳐 1603년 사간(司諫, 사간원에서 임금의 잘못을 논박하던 종3품)으로 승진 최영경과 정철 등을 탄핵했다. 이듬해 승정원의 부승지(副承旨, 정3품)가 됐고 1606년 강원도 관찰사(종2품 감사)가 됐으며 이어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 정3품), 이조참의(정3품차관보), 백관을 규찰·탄핵하던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 검찰총장), 사간원의 정3품 수장인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고 소인을 멀리했으며, 관부나 가정에서 늘 최선을 다했다. 만년에 낙향해 회덕 자운골에 은거했다. 그를 비롯한 종형제 12명은 죽부 행열자 계열의 외자 이름을 썼는데, 12인이 여러 벼슬을 하면서도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고 효우로서 가문을 지키고 시가로서 자연을 만끽하면서 품위 있는 선비 생활을 즐겼기에 이들을 세정 12죽(竹)이라 칭했다. 묘는 회덕 잔골(대덕구 석봉동)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