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둔산여고 교장
작년 여름 지리산 종주를 하고 올 여름에는 설악산을 종주할 계획으로 여러 날을 설렜다. 등산에 입문하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나름의 성과라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불과 2년 전만해도 뜨거운 여름날 산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이 들어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등산은 내 인생에서 큰 선물이 됐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도 좋지만 그 과정이 우리 인생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더 좋다.
장마 뒤라 설악은 투명하게 시린 물을 안고 도는 계곡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나뭇잎이 바람을 만나 켜는 자연의 음악을 벗 삼아 걷는 백담사에서 수렴동 대피소까지는 그야말로 ‘힐링’ 숲길이다. 일상에서의 각박함이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에 콧노래를 가볍게 흥얼대면서 자못 여유도 부렸다. 주변의 풍경에 눈을 빼앗기면서.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면서 물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급격하게 경사진 길이 열렸다. 봉정암까지 오르는 코스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더 이상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 삶이 이 길 위에 펼쳐져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살다보면 콧노래가 나오는 길이 있는가하면 이렇게 나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그런 길도 있었음을. 그 사이 소청 대피소를 지나 숙소인 중청 대피소에 도착했다. 소청 대피소에는 바람이 먼지를 걷어간 뒤라 온 세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펼쳐져 우리 일행을 감탄하게 했다. 좀 더 올라가 또 다른 풍경을 보리라 기대하고 걸었는데 길 중간부터 안개가 몰려오더니 중청 대피소에서는 한 치 앞의 풍경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은가. 매 순간 열심히 즐기며 주어진 것들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밤새 울어대는 바람 속에서 잠을 설치고 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안개가 짙다. 그러나 우리는 알았다. 하산하는 길이 더 아름다우리라는 것을. 천불동 계곡은 기기묘묘한 절벽들이 빚어내는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그중에도 눈을 확 사로잡는 것은 건너편 벼랑 틈새마다 초록의 몸을 흔들고 있는 소나무다. 살아남기 힘든 환경에서도 뿌리내리고 저렇듯 싱싱한 빛으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니. 오로지 제 힘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기에 더 대견하고 더 아름다운 것 아닐까 생각했다.
소나무 위로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얼굴도 있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부모 혹은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앞에 부는 작은 바람마저도 막아주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선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 맞게 될 바람까지 모두 대신 막아줄 수 있을까? 봉정암까지 오르는 그 가파른 오르막길을 대신 올라줄 수 있을까? 우리 어른들의 역할은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건강하게 키워 세상을 살아갈 힘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바람도 맞고 비도 맞아봐야 아이들 각자의 힘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벼랑 위 바람 속에서 더 싱싱한 소나무처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덧 비선대에 접어들었다. 아쉬움에 돌아다 본 설악의 계곡은 여전히 위엄 있게 그 곳에 있었다. 많은 생명들을 품은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