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후손을 지칭하는 '금천강씨'

진주강씨에서 분파된 본관 중 하나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고구려에 보내온 모욕적인 국서의 내용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 조선 전기에 이문흥(李文興)이 지은 야사집)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사실을 신채호가 인용한 것이다. 그 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해 강화를 맺고, 상품교역을 재개했고, 십 수 년이 지난 뒤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영양왕 23) 고구려를 재침공하자 강 장군이 수륙양군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통할하던 무관으로 병권을 도맡은 장수)가 돼 왕제 건무(뒤에 보장왕으로 해군참모총장격)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육군참모총장 격)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했다.

한편 수양제는 별동대 30만 5000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켰으며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 까지 유인했고 그때서야 속은 것을 알게 된 수양제는 회군하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했다. 이로 인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는 만주 심양현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 원수림 역전에 ‘병마원수강공지총’이란 큰 비가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 소멸됐고 현재 묘역은 밭으로 개간돼 묘지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있다.

진주강씨 문중의 기록에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판내의령(判內議令 종1품)으로 재임 중이던 강진(姜縉)이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져 이때부터 강씨(姜氏)는 본관을 진주(晉州·진산晉山)로 정함에 따라 관향(得貫)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후 천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주강씨는 우리나라 성씨(姓氏)중 유일하게 갈라지지 않고, 천파일본(千派一本)으로 지속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진주강씨세계(晋州姜氏世系)에 금천강씨(衿川姜氏)는 인헌공파(仁憲公派)로 나타나 있다. 인헌공파(仁憲公派)도 강씨(姜氏)의 도시조(都始祖) 강이식(姜以式)의 후손이지만, 본관을 금천(衿川)으로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1세조로 삼아 계대(系代)하고 있다.

강감찬(姜邯贊, 자는 은천(殷川), 시호는 인헌仁憲))은 고려조 성종 2년 문과(文科 대과)에 장원급제해 예부시랑(禮部侍郞 정4품 차관)을 거쳐 국자제주(國子祭酒, 고려 때 국자감 혹은 그 뒤를 이은 성균관의 종3품 벼슬), 서경유수(西京留守 2품지방장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정2품 부총리)를 역임했다.

현종9년 거란의 60만 대군이 고려에 침입해오자,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군대를 통솔하던 무관)로 상원수(上元帥, 출정하는 군대를 통솔하던 대장)가 돼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했고, 회군하는 적을 귀주(龜州)에서 크게 무찔러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정2품부총리),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5번째 작위)으로 식읍(食邑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 것) 3백호(戶)를 받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에 책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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