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비 출납에 정확했던 안순

안순은 1393년 사헌부의 정6품 검사인 감찰(監察),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 겸(兼) 지제교(知製敎)로 승진했다. 1396년 김해판관(判官, 종5품)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1397년에 예조좌랑(佐郞, 정6품)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으로서 중앙 관리로 복귀했다. 1398년 여름에 강원도의 지방관을 규찰하던 종5품 도사(都事)가 됐다가 이 해 가을에 사헌부(司憲府)의 잡단(雜端, 5품 검사)으로 다시 중앙에 복귀했다.

그가 사헌부 잡단으로 재직할 때 궁녀 한 명이 죄를 범하자, 태조는 당시 사헌부 수장인 종2품 대사헌(大司憲)이던 조박(趙璞)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박은 안순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했으나, 그는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조박은 그에게 명령대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우선 유사(有司)에 명해 심문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화가 암시하듯이 그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1401년(태종 1년) 병조정랑(正郞, 정5품 전랑) 겸(兼) 형조도관(都官, 노비 문서와 노비관련 소송을 관장), 1403년 사평부(司平府, 조선 태종 원년 1401년)와 전곡(錢穀)에 관한 일을 맡았다. 태종 3년에 6월 관제를 고칠 때 개편된 바 있고, 동왕 5년 1월에 혁파돼 호조에 합쳤다. 또한 경력(經歷, 종4품)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인 장령(掌令)을 거쳐, 1407년 우부대언(右副代言, 밀직사의 정3품 벼슬로 우부승선의 후신)과 경상도관찰사(종2품 감사), 좌군총제(左軍摠制), 집현전의 제학(提學), 1414년 충청도관찰사, 1419년(세종 1년) 호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으로서 정조사(正朝使, 정월달에 중국에 가던 사신)가 돼 명나라에 다녀와 1420년 공조판서(判書, 정2품 장관)로 승진했다.

1423년 함길도 도관찰사(종2품 감사)에 이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정2품 참찬)가 됐다. 이듬 해 호조판서(정2품 장관), 143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중추원의 종2품) 겸(兼) 판호조사(判戶曹事), 1435년 의정부찬성사(贊成事, 정2품 부총리)를 거쳐, 1437년 충청도의 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아치)로 임명돼 잘 수습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품계)에 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호조판서와 판호조사를 겸하면서 국가의 전곡(錢穀)을 관장했는데, 경비 출납에서 추호도 틀림없이 정확했다고 한다. 이에 수많은 관직을 역임했지만 특히 국가의 재정을 책임 맡은 직에서 가장 공로를 쌓았던 것이다.

1439년에 신병으로 금천별서(衿川別墅, 별서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으로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 점이 다름)에 은퇴했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저술로는 근재집(謹齋集) 부록에 유고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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