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 개창한 안운산(安雲山) 종도사(宗道師)
안운산(安雲山)은 현대 순흥안씨(順興安氏)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이다.
증산도를 개창한 안운산(安雲山,1922년~2012년 2월 24일) 종도사(宗道師)가 2012년 2월 24일 오전 10시 선화(仙化, 별세)했다. 도수(道壽) 90세이다.
1922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안운산 종도사(宗導師)는 강증산(1871년∼1909년) 상제를 신앙하던 보천교(普天敎) 신도이던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12세 때 보천교에 입도했다. 안 종도사(宗導師)는 이후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으로 침체에 빠진 도문을 되살렸고, 1950년 6·25전쟁의 참화로 또다시 흩어졌던 상제 신앙의 맥을 부활시켜 증산도를 개창했다. 안운산 종도사(宗導師)는 1970년대 이후 증산도 최고 지도자로 증산도문을 이끌었다. 유족으로는 안운산 종도사(宗導師)를 보필한 안경전 등 7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증산도장으로 치렀으며, 분향소는 대전 증산도교육문화회관에 마련됐다. 장지는 충남 공주시 유구읍이다.
<증산도(甑山道)>
1974년 안세찬(安世燦, 호는 운산)이 대전에서 창립한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이다.
안세찬(安世燦)은 순흥안씨 참판공파(參判公派, 참판은 6조의 종2품 차관)의 후손으로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보천교(普天敎)인 이었던 아버지 안병욱(安柄彧)의 영향으로 증산교를 접한 후, 14세 때 초통(初通)했다고 전해진다.
8·15광복 직후 이상호(李祥昊,1888~1967년, 증산교인), 이정립(李正立) 형제와 관계했다고도 한다.
그 뒤 은둔생활을 하다가 1974년 활동을 재개하고, 1978년 대전에서 ‘대법사 증산교’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증산교단을 창교한 후, 1980년에 교당을 신축했다. 1981년부터 전국 대학가에 신앙모임을 결성해 활발히 활동하던 때를 필자도 당시 학생으로서 기억한다.
1984년에 ‘증산도(甑山道)’로 교명을 바꾸었고, 오늘날 증산교단(甑山敎團) 신종교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포교활동 및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이다.
1980년대 초반, 대학생 등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족종교(民族宗敎)’로 인기를 끌었던 증산도(甑山道)는 이제 신자 100만 명의 종교로 성장했다. 이 가운데 30대 이하 젊은층 비율이 50%에 육박한다는 게 증산도(甑山道) 측의 설명이다. 그만큼 ‘젊은 종교’여서 증산도(甑山道)의 미래가 밝다고 한다.
증산도(甑山道)의 성장 과정엔 안운산(安雲山) 종도사(宗導師)의 구실이 절대적이었다. 안운산(安雲山) 종도사(宗導師)는 75년 이후 현대 증산도(甑山道)의 기틀을 다져왔을 뿐 아니라, 증산도(甑山道) 경전인 도전(道典)을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로 번역해 증산도(甑山道)의 세계화(世界化)를 이끌어왔다.
증산도(甑山道)는 강증산(姜甑山)을 도조(道祖)로 모시는데, 우주의 삼계대권을 주재해, 천지인(天地人) 삼계를 다스리는 우주 주재자인 하느님으로 믿는다.
창교자 안세찬(安世燦)을 종도사(宗導師)라고 부르고, 그 아래 종정(宗正), 교정(敎正) 등의 조직을 두고 있다. 증산상제와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 안운산(安雲山, 안세찬의 호) 종도사로 이어지는 종통맥을 강조한다.
현재 증산도(甑山道)의 지도자인 안경전(安耕田)은 안세찬(安世燦)의 아들이다.
그는 일반 대중이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증산교 교리서적을 1980년대 초에 발간하는 등 대학가의 젊은 지식인층을 상대로 교세확장을 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