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조선 기호학파 이끈 송시열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 중에서 충청 출신의 한 인물은 조선 후기 정치에서 큰 명성을 떨쳤고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는 등 적지 않게 이름을 날리며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론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거론됐다는 점만 봐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대단한 학구파, 효종과 인연을 맺다
1607년 태생인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 또는 우재(尤齋)이다.
송시열은 충북 옥천군(沃川郡)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 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송시열은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돼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과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 씨(韓山李氏)와 혼인했는데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움을 터득해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해 장원으로 합격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됐는데.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좌절감 속에서 낙향해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향촌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했다.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다
관료생활을 접은 송시열은 자신의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중국 송(宋)대 학자인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조광조와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말할 때마다 주자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순수한 이성에 따른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했고, 이것은 조선 후기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됐다.
그를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는데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들을 통해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고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위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이념으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조선 정치의 중심에 서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했는데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의 관직을 주어 불러들였다.
이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해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조선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을 지나 엄청난 당쟁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러한 당쟁은 조선 중엽에 모습을 드러내 세도정치가 등장한 조선말까지 이어지는데 애초 정국 주도권을 잡은 건 동인이었으나 인조반정을 거치며 서인이 득세했다.
서인은 숙종 초 핵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었고 약 100여 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해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붓으로 천하를 휘어잡은 독특한 정치인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했지만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송시열은 거의 관직을 단념했다. 하지만 조정의 끈질긴 구애 끝에 1668년 우의정,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시종 재야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됐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됐고, 1675년 덕원(德源)으로 유배됐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여 소장파 서인의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張氏)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돼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과 정읍, 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자료=서흥석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