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 개화사상 도입 선구적 역할 국민교육·계몽사업 전념했지만…

한말에 한성부민회장(漢城府民會長)을 지낸 유길준(兪吉濬, 1856~1914년)은 우리나라에 신지식과 개화사상을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일본 및 미국의 유학생으로 국한문을 혼용해 현대문으로 ‘서유견문’을 저술했으며, 내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나, 12년의 망명생활 후 귀국해 교육과 계몽사업에 전념했다. 저서에는 유길준전서(兪吉濬傳書)가 있다.

유길준은 19세기 말 누구보다 외국사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국비로 유학을 했고, 유럽과 동남아 등을 두루 돌아본 국제통이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 대혼란의 시기에 정작 그는 오랜 유폐와 망명 등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뜻을 펼칠 장을 그다지 얻지 못했다.

그는 정치 일선에 있기 보다는 배후에 있었다. ‘서유견문’ 이라는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의 서양견문록 및 경세관이 담긴 책을 쓴 유길준은 행동하는 개혁가라기보단 사상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유길준은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들겠다는 국민 개사(國民皆士)의 뜻을 품고,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는 등 교육사업을 벌이고 한성부민회를 설치해 ‘지방자치제를 시도’ 해보기도 했다.

또한 계산학교와 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해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허무하게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피탈하고 말았다.
1910년 이후, 유길준은 나라를 잃은 자괴감에 칩거했으며, 일본에서 주는 남작지위를 끝내 받지 않았고 1914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평생 아무런 공도 이룬 것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유길준은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세거하던 기계 유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유진수와 외할아버지 이경직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외할아버지 이경직은 고위관료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재력가로 서울 북촌에 거주하며 당시 집권층이던 노론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전한다.

청소년 시기 유길준은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신학문을 접하게 됐고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는 청나라 위원이 쓴 세계지리서 ‘해국도지’ 등 개화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세계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유길준 묘역

개화에 뜻을 두게 된 유길준은 과거제도가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유길준은 훗날 급진개화파로 변신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과도 친분을 갖게 됐다. 그러나 박규수 사후에는 실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강위의 문하에 들어가 김윤식 등과 어울리면서 유대치의 지도를 받은 급진 개화파와는 그 노선을 달리하게 됐다.

그밖에 외무대신(外務大臣, 구한말 외무아문의 정2품 외무장관)을 지낸 유기환(兪箕煥, 1858~1913년), 유길준(兪吉濬)의 동생으로 메이지대학(明治大)을 졸업했고 여러 관직을 거쳐 내무협판(內務協辦, 종2품 행자부 차관)에 오른 유성준(兪星濬, 1860~1934년) 등이 한말의 인물로 의절(義節)의 가통을 이었으며, 새정부의 ‘대한민국헌법’을 기초한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박사는 기계유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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