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본사 상무/총괄국장

극단주의자에 의해 테러를 당한 리퍼트 주한 미 대사.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다운 그의 의연하고, 재치 있는 언행으로 인해 곳곳에서 호평이 답지한다. 특히 그가 던진 ‘같이 갑시다.’란 말이 인구에 회자(膾炙)되니, 곱씹어 볼수록 만감이 교차한다.

‘같이 갑시다.’ 흔한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뜻이 함께 하는 순간, 즉 공감하고, 동의하게 되면, 더불어 많은 것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잠재력 높은 권유의 메시지임에 틀림이 없다. 한 지향점을 향해 가고 있노라면 이 말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동행이므로, 만사형통이 아닐 수 없다. 이보다 더 빨리, 더 쉽게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같이 갑시다.’의 의미에 취하다 보니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가열되고 있는 ‘증세와 복지 논쟁’, ‘연금개혁 갈등’, ‘갑질 논란’, ‘아동 학대’ 등 사회 이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수많은 이 논란과 논쟁의 이면에는 같이 가려는 ‘우리’와 따로 가려는 ‘나’ 간의 대결 구도가 똬리를 틀고 있다.

증세와 복지 논란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격차 발생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불가피한 것이라고 방치해 둔다면 사회는 치유 불가능한 중병이 들고 만다. 그래서 이 격차를 해소하고, 소득을 재 분배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 수단이 세금이다. 정부의 정책은 세출을 통해 실현된다. 주머니에 든 만큼 쓸 수 있으므로, 세금을 더 걷지 않고, 복지 지출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증세를 하지 않으려니 다른 정책을 축소하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다.

정부가 증세(增稅)를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증세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거부감이란 것이 복지 자체에 있기보다 증세에 동의할 근거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이라면 해법을 달리 해야 한다. 우선, 정부가 솔선수범해 청렴으로 예산 절감에 앞장서고, 건전한 재정 지출로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다음, 복지 확대와 증세의 필요성을 소상히 설명하고, '같이 갑시다.'를 외쳐야 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빈곤의 구제에서 출발했으나 이제는 마땅히 누려야 할 국민의 권리가 돼버린 복지를 두고 셈을 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주지하다시피 ‘복지’는 단순히 복지의 손길이 필요한 그들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복지혜택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가진 자에게도 복지 정책은 불가분의 관계다. 손길이 필요한 그들이 복지 정책에서 소외돼 생활 기반과 건강,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면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결국 재정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하고, 계층 간 갈등 등 사회적 비용 증가로 인해 결국 더 큰 증세로 이어지는 부메랑을 맞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도우며 사는 것이 함께 잘 사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이미 진화를 거듭하는 수백만 년 동안 반복되는 수많은 직 간접의 체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모르는 척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더구나 사회의 약자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강자와 달리 국가 정책에서 훨씬 소외되기 쉬운 것이 현실이므로, 이들에게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많이 제공돼야만 한다.

미국 제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연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발전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게 아니라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제공함으로써 증명된다."고 역설했다.
불안해 보이는 경제 지표의 출현과 싸늘한 체감경기 속에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경기침체를 경험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되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절실한 시점이라 그런지 그의 말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 ‘같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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