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길 목원대학교 스포츠건강관리학과 교수

인불구(人不救). 충남 공주시 반포면 마암리의 마라귀에 있는 바위에 새겨져 구전 되어 내려오는 설화이다. 짐승도 자신을 사지에서 구해주면 은공을 알고은혜를 갚으려 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구해줘도 은혜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해치는 수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누군가가 바위에 새겨 두었다고 한다.

짐승은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보은하지만 인간은 배신한다는 이 설화는 시혜(施惠)와 보은(報恩)이라는 관계의 윤리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또한 인간의 배은을 짐승의 보은과 대비, 인간의 신의 없음을 일깨우고 인간 사회의 윤리와 도덕성의 회복을 역설하는 교훈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설화의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면 한마디로 은혜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은 절대로 도와주거나 구해 줄 필요가 없다는 얘기이다. 즉 머리 검은 짐승(사람)은 거두지도 말고 구(救)하지도 말라는 뜻일 게다. 인간은 분명 동물보다 우수하지만 동물보다 못한 면도 있다. 특히 인간이 유독 동물에 비해 많은 부정적 행동중 하나가 바로 배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배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란 말인가? 그래서 일까 인간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의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잠재적 소시오 패스(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면 쓰고, 칼을 등 뒤에 숨기고]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영혼은 누구일까?" 어느 철학자의 질문이다. 그는 거짓말쟁이, 살인자, 육친을 죽인 사람, 성범죄자, 히틀러와 같은 대량학살을 저지른 반인륜범죄자가 아니라 ‘배반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배신의 역사를 보아 왔다. 그 중에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꼽는다면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예수를 배신한 ‘유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배신은 보통의 배신이 아니었다.

시저가 절친 브루투스의 배신으로 암살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넘어야할 분명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바로 권력이다. “브루투스 너마저…” 세상이 날 배신해도 브루투스 네가 나를 배신할 줄 꿈에도 몰랐다는 시저의 마지막 한탄의 절규였을 것이다. 또한 시저는 무수한 칼에 찔리면서도 잘 버티다 암살자의 무리 중에 브루투스를 발견한 뒤 ‘브루투스! 너도 나의 아들이다’라고 한탄하며 외쳤다고 한다. 배신의 극치였다.

예수도 바로 유다의 키스가 신호가 되어 그를 심판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죽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가장 다정한 입맞춤이 비겁한 공격의 신호로 쓰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 제자에게 배반당한 예수도 뼈속 깊이 시린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배신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I’m ok, you‘re not ok’ 즉 나는 항상 옳고 너는 틀리다는 심리가 깔려있다고 한다. 따라서 배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배신에 대해서도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리화시키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해 보이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때 배신을 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하지만 의리 있는 사람, 은혜를 아는 사람, 소중한 걸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쉽게 배신하지 않는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많아졌다는 요즈음에는 인면수심(人面獸心)과 같은 표현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화가 날 때면 ‘개 같은 사람’이라는 욕을 하지만 개들은 되레 “어찌 감히 우리를 한심한 당신들과 비교한단 말인가?” 라며 人面獸心(인면수심)을 獸面人心(수면인심)으로 바꾸라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우리사회 곳곳에 널려 있는 얼굴만 사람인 인면수심의 족속들에게 정확히 급소를 찌른 정문일침(頂門一鍼)이다.

필자도 한때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다.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밤잠을 설쳐야 했다. 배신이란 건 당해본 사람만이 뼈 속 깊이 시린 그 아픔을 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라며 탄식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생각이나 환경을 잘 살펴 배신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사는 배신의 역사이던가? 인간은 누구나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있다. 필자도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이 가면이 점점 두터워짐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책임감과 무게감이 상당히 무거워지기 때문에 솔직하게 표현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를 벗어 던져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그리 싶지 않다. 오늘도 인간관계속에서 ‘人不救’라는 말을 자꾸 되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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