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절의+예의+개척+선비정신 ='양반의 고장' 완성
예부터 충청도는 충절의 고장이라 불려왔고 충청도 양반이라 해 양반하면 곧 충청도라는 지명이 따라왔다. 충청도는 전형적인 선비의 고장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충청도의 이러한 기질적 특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좁게 지리적으로 살핀다면 금강과 계룡산, 유부도갯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 정중앙에서 젖줄역할을 한 금강과 서해안의 유부도갯벌은 충남을 곡창지대로 만들었고 풍요로움이 넘쳐나면서 한양에서 많은 양반들이 내려오게 됐다.
또 금강과 갯벌이라는 자연적인 요건 때문에 외세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으면서 외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선비정신이 생기게 된 것이다. 또 계룡산이라는 영산에 학문을 닦는 이들이 몰렸고 적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충청=양반’이라는 공식을 성립하게 했다. 충남도는 예전부터 불려왔던 양반의 고장 충남의 정신을 5개로 설정했다. 이러한 정신을 통해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충남의 5대 정신은 무엇이 있고 각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가 있는지 살펴보자.
◆충효정신- "백제를 지켜라" 결사대 주도 계백

충효라는 말은 원래 논어의 효제충신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효제충신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가 서로 우애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에게 미덥게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충은 역시 임금, 혹은 나라를 섬기는 정신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원래의 뜻은 인간의 내면적 양심인 ‘성실한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충효에서의 충은 임금, 혹은 나라를 섬기기를 바라는 내면의 성실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다. 특히 충은 공자사상의 핵심이 되는 덕목이다. 공자는 일찍이 “나의 이치는 하나로 관통된다”고 했고 증자는 그것을 “내면적 양심으로 곧 성실한 마음이고 자기의 마음을 남에게 헤아리라는 배려의 마음”이라고 복합적인 뜻으로 풀이했다.
충을 대표하는 충남의 인물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제국시대까지 곳곳에 존재했다.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백제를 지키려 했던 계백 장군이나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앞장섰던 최영 장군, 관직을 박탈당함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으로 출전해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등은 충을 대표하는 우리 지역의 위인들이다.
충이 단순히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효 역시 부모를 섬기라는 단순한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고 쓰였는데 효를 묻는 질문에 공자는 “살아계실 때 부모를 섬기고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러드리며 제사드리는 일 모두가 효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으로만 봉양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공경해야 하고 어버이의 뜻을 잘 헤아려 항상 보시기에 편안하고 기쁜 얼굴색을 가져야 한다”고 정의했다. 단순히 부모를 모시는 것이 아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 효라는 것이다.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뜯어 내 이를 미끼로 삼아 고기를 잡아 어머니께 드렸다는 공주의 향덕은 다소 논란이 있긴 하지만 당시 신라가 그를 기려 효비를 세웠던 만큼 효를 대표하는 충남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절의정신 - 日 끌려간 의병장 최익현 단식투쟁

충이 성실로써 자신을 다하는 것이라 한다면 절의는 그것을 꿋꿋이 잘 지키고 실천하는 정신이다. 충남을 대표하는 단어 중 충절은 이 절의정신에서 출발하고 수많은 절의정신을 지킨 위인들이 충남에서 나고 자랐다.
특히 충남의 절의정신은 백제시대 때부터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백제의 멸망을 앞두고 왕에게 직언을 했던 성충과 흥수를 비롯해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절사한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 병자호란 때 적에게 잡혀가 절의를 지키다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윤집과 오달, 홍익한 등이 충남을 대표하는 절의정신을 지킨 위인들이다.
특히 일본에 의해 대마도로 잡혀가 ‘일본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한 의병장 최익현과 윤봉길, 유관순 열사들 역시 드높은 절의로 귀천하신 충남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예의정신- 17세기 예학의 시대 이끈 김장생

원래 예란 인간이 음식을 차려서 하늘에 제사를 해 복을 비는 행위로 공경하고 겸손함이 기본이다. 예(禮)라는 한자에 신(神) 자가 붙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공자는 이러한 신을 섬기는 ‘사신(事神)으로서의 예’를 사람을 섬기는 사인(事人)으로 뜻을 풀이했다.
즉 하늘을 섬기 듯 사람을 섬기게 하는 행위가 바로 예인 것이다. 공자는 덧붙여서 예는 일상생활에서 사람에 대한 공경과 겸손의 행위라고 지칭했다.예는 이렇게 일상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는 무엇을 표본으로 삼아야 하는 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공자는 이에 대해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겨야 한다’고 했다. 또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말하지 아니하며 움직이지 말라’고 해 예의 실천을 중요시 했다. 이러한 예는 곧바로 한반도로 전해지게 됐고 임금과 나라, 부모를 섬기는 충효,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절의와 함께 중요한 사상으로 성장하게 됐다.
특히 충남지역은 예를 학문으로 발전시켜 예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케 했고 이는 점점 발전해 조선 학문의 최고봉인 성리학의 근간이 됐다. 특히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성행했고 김장생과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과 같은 샛별같은 예학자들이 충남지역에서 쏟아졌다.
◆개척정신- "온고지신" …추사체 만든 김정희

려시대 때에는 송나라의 정신보 부자가 서산의 간월도로 망명하자 성리학을 보급시켰고 백이정은 중국으로의 성리학 유학을 통해 도학의 기본을 들여왔다. 특히 목은 이색은 송나라의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늘과 사람의 원리는 하나)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천인무간(天人無間·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 성리학을 보급시켰다.
이 외에도 공주 출신의 김종서 장군이 함길도 6진을 개척해 조선의 국경을 넓힌 점이나 이순신 장군이 최초의 철갑선을 도입시켜 나라를 구한 것은 충남의 개척정신이 국난극복에 사용된 사례들이다.
17세기 들어서는 김장생과 김집을 중심으로 조선예학이 조선 문학계를 개척했고 18세기 홍대용은 지구 중심의 우주인 천동설이 아닌 우주 중심의 지구인 지동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구는 돈다는 지전설을 내세워 국내 천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8세기와 19세기 사이에는 추사 김정희가 추사체라는 새로운 글씨체를 만드는 등 충남에는 개척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여럿 있다.
지금 살펴본 개척정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전혀 새로운 분야에 처음으로 도전해 창의적으로 새 길을 열고 닦는 창조적 개척이고 또 하나는 이미 기반이 형성된 터전 위에 창의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시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적 개척이다. 충남의 개척정신은 법고창신적 개척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을 가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소극적 입장을 넘어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지와 기상을 담고 있는 만큼 당시에는 굉장히 창의적 개척만큼이나 호평을 받았다.
연암 박지원 역시 문화개혁 운동을 위해 ‘옛 것을 본받는 법고는 때묻을 병폐가 있고 새롭게 창조하는 창신은 상도에서 어그러지는 병폐가 있다. 법고하되 변화를 알고 창신하되 전거에 능해야 한다’고 한 만큼 창조적 개척만큼 법고창신적 개척 역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선비정신- 주자의 가르침 실천한 송시열

우선 선비는 500년 역사의 유교국가 주선이 길러내고자 했던 이상형의 유교적 인간상이다.
그것이 유교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선비는 우선적으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존재여야 했다. 유교적 소양은 유교 경전의 공부를 통해 얻어진 기본지식이나 학문을 이르는 것으로, 즉 선비는 유교적 지식인을 뜻한다.
충남의 다른 정신들을 말하면서 유독 유교적 지식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비정신에서 유독 유교적 소양을 요구하는 것은 조선 선비의 기본이 성리학이였고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주지주의(主知主義)적 입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비는 유교적 지식인만을 뜻하는 것 역시 아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으면 선비로 인정받지 않았다. 유교가 원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존재 때문이다. 그것은 선비의 자기자신에 대한 철저한 성찰 때문이고 또 세상에 대한 공적 책임의식 때문이다.
일찍이 증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세 가지 문제로서 반성하는데 하나는 남을 위해 일을 하면서 내가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또 하나는 친구와 만나면서 내가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는가, 마지막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내가 혹 익히지 못함은 없었는가’로 표현한 만큼 선비는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면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항상 전제돼 있었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걱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가족으로, 이웃으로, 그리고 국가와 천하로 이어진다.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는 ‘선비는 인(仁)을 구현할 책임이 자기자신에게 있고 그 노력은 죽어서야 끝난다"고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선비는 예와 음악을 알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해야 하며 또 글씨를 잘 쓸 뿐 아니라 수리에도 밝아야 한다, 이른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선비의 요건은 매우 복잡하지만 충남에는 돈암서원(김장생, 김집, 송시열)과 충현서원(이존오, 이목, 성제원, 서기, 조헌, 송준길, 송시열), 노강서원(윤황, 윤문거, 윤선거, 윤증) 등 충남의 대표적 서원에서 배양된 유현들과 한말의 의병장 최익현 등으로 대표될 수 있다.
유독 충남지역에 선비들이 많았던 이유는 역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과거 극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중국은 모든 선비들이 본받아야 할 것들이 집대성돼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선비문화는 서해를 통해 충남으로 가장 먼저 유입됐던 지역이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