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꾹 눌러도 터져나온 문학혼…조선시대 당찬 여인들

조애중의 '병자일기'
이옥재 부부의 시가 실린 '안동세고'

김호연재의 '호연재유고'

충남의 생활문화들이 보이는 타 지역과의 다른 점은 너무나 극명하다. 하지만 충남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문인은 타 지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았고 과거 우리나라가 여성들의 문자행위 전수에 취약했던 점을 고려할 때 굉장히 진취적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여성 문인의 규모로 평가하면 충청권이 가장 으뜸이다.

그중에서도 충남의 문인들이 가장 도드라지는데 충북의 경우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이 대표적이고 충남에는 김임벽당, 신부용당, 이옥재, 남정일헌, 조애중 등이 있어 객관적인 수치로는 훨씬 많다. 이는 전국에서 충청, 충청에서도 충남이 가장 진취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진취적이었던 충남에 어떤 여성 문인들이 활약을 했는지 살펴본다. 

◆시문으로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은 16세기의 여성 문인들
김임벽당은 의성 김 씨 김수천을 아버지로 뒀고, 남편은 기계 유 씨 유여주로 부여에서 태어난 융주로 알려졌다. 김임벽당은 유여주와 혼인 후 서천 비인현에 살았다. 김임벽당이 글을 깨우치게 된 것은 조부로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 유여주는 1518년 18세에 현량과에 추천돼 이름이 높았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향 비인에 은거했다.

김임벽당은 한시를 잘 지었는데 ‘임벽당칠수고’가 대표적이다, 이 시집은 김임벽당이 직접 편찬한 것은 아니고 그의 7대 손인 유세기가 편집했다. 시집의 편찬동기는 1683년 서장관 김두명이 중국사행을 다녀오면서 명나라의 전겸익이 엮은 ‘열조시집’을 유세기에게 보여줬는데 이 책에 임벽당의 시가 수록된 것을 보고 귀국하자마자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임벽당칠수고에 실린 7수 가운데 ‘제임벽당’ 2수는 임벽당이 베개에 자필로 수놓은 것으로 약 200여 년간 후손들이 보관해 내려왔다고 한다. 임벽당은 시뿐 아니라 글씨 쓰는 것 등 손재주에 능했다. 임벽당의 시는 여러 시집에도 실리곤 했는데 이 정도의 실력이 살아생전에도 시로 이름을 날렸을 거라는 것이 학계의 추측이다.

16세기 또 다른 대표적인 여성 문인은 현재 세종시로 편입된 연기 출신의 창령 성 씨이다. 창령 성 씨의 아버지는 성희로 성삼문의 당숙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창령 성 씨는 문집이 있을 정도로 시에 재능이 있었지만 안타깝게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패관잡기’에서 사대부들이 여성 문인들을 꼽았는데 창령 성 씨가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만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인정한 실력이면 상당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성우월주의 속에서 핀 17세기 여성 문인
17세기 충남을 대표하는 여성 문인은 조애중과 이옥재이다.
조애중은 춘성부원군 남이웅의 부인으로 ‘병자일기’의 저자이다. 조애중이란 이름 대신 예전부터 ‘남평 조 씨’로 칭해왔는데 지난 2013년 남산영당의 신주에서 이름이 발견돼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묘는 공주 반포면에 위치해 있다.

병자일기는 1636년 12월 병자호란을 당해 황급히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해 이후 서울 집으로 돌아와 정착해 생활한 1640년 8월까지의 일기이다. 별자일기의 시작은 남한산성에 머물고 있는 남편으로부터 ‘일이 급하게 됐으니 짐붙이는 생각 말고 빨리 청풍으로 가라’는 편지를 받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내 조애중은 양식을 담은 쌀 궤 하나를 가지고 출발했고 피난처를 바꾸는 과정에서 겪는 노년 양반 여성의 고난을 섬세하게 기록했다. 특히 남편이 세자를 시종해 1년여 동안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기도 했는데 조애중은 슬하 4남 1녀(결국 모두 죽었다)를 생각해 버틴 심정도 모두 병자일기에 담겨있다.

또 다른 인물인 이옥재 역시 당시의 시대상과 어울리지 않는 평등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이옥재는 당대 최고의 문장 사대가 중 한 명인 이소한과 이정구의 자손으로 문학적 환경을 고스란히 받은 인물이다. 남편 김성달은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붙이고 순직한 김상용의 손자로 둘의 만남은 조선의 충절과 학술의 만남이었다.

이옥재는 결혼 후 홍성 갈산면의 한 어촌 마을에 살았는데 평등적인 부부관계를 실현하면서 슬하 9남매를 모두 문학가로 키웠다. 이옥재가 남긴 시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남편과 함께 지은 ‘죽어서 저승에 가서도 다시 부부가 되겠노라’라고 한 ‘안동세고’가 대표적이다.

안동세고는 총 249수가 실렸는데 이 중 71수가 이옥재가 지은 것들이다. 이옥재의 시는 같은 주제를 놓고 남편과 주고받는 형식이 주를 이룬다. 우리나라 역대 문학 중 부부가 서로 시를 주고 받는 경우는 있었으나 그 중 안동세고는 규모면에서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이옥재의 시는 행복한 일상, 어촌의 풍정, 이별과 연모, 사랑의 맹서 등이 주 내용으로 그의 시를 통해 평등했던 부부관계를 추구했던 이옥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고독했던 18세기의 여성 문인
이옥재의 남편인 김성달은 울산 이 씨를 부실로 들였는데 울산 이 씨 역시 시를 통해 이름을 날렸다. 울산 이 씨는 김성달의 부실이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은쇄록’에 따르면 울산 이 씨는 처음엔 시를 지을 줄 모르다 김성달 사후 외로움에 사무쳐 그의 시를 100수 가까이 외우면서 자연스레 통달했다.

울산 이 씨의 시는 주로 고독과 시름이 주된 정조이다. 그의 시풍은 여러 시제에서 나오는데 ‘공규(空閨)’, ‘사창수(紗窓愁)’ 등의 시어와 ‘혈루진(血淚盡)’, ‘읍평생(泣平生)’ 등 시어에 잘 표현돼 있다. 그의 시는 ‘우진’이라는 시집으로 묶여 총 53수가 담겨있다. 우진에는 김성달이 울산 이 씨에게 준 이름 없는 시 24수도 같이 실려 있다.

오청취당은 울산 이 씨와 함께 18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이다.
청취당은 경기 양성현(현 평택 포승)에서 태어나 서산 음암면 유계리의 김한량과 혼인하면서 서산으로 처를 옮겼다.

청취당은 호인데 청취당이 해주 오 씨이고 관향이 수양이다. 수양 땅은 고죽군의 아들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곳이어서 성자의 맑은 성품과 대나무의 푸른 빛을 취해서 스스로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취당의 시 역시 울산 이 씨처럼 고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청취당이 결혼할 당시 시댁은 학문가의 가풍을 이어오고 있었으나 남편이 벼슬에서 자꾸 낙방하면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어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여기에 25세와 26세 때 자식을 낳자마자 잃으면서 병고에 시달리면서 시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곤 했다. ‘청취당집’이란 시집을 통해 청취당은 자서적이고 유언적인 마음을 표현했다. 청취당집은 182수가 실려 있다.

◆다양한 문학활동에 두각을 보인 19세기 여성 문인
20세기에는 시보다는 문장이나 번역 등의 문학 활동을 활발히 한 여성 문인들이 대표적이다.

목천에서 태어난 곽청창은 문장으로 유명했던 문인이다. 성해응이 지운 ‘초사담헌’에는 곽청창의 문집 6권이 있다고 했으나 현재는 발견되지 않았다. 성해응의 기록에 따르면 곽청창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에 끼를 보였고 그의 남편이 눈을 감았을 때 직접 묘지문을 쓰기도 했다. 묘지문은 친척인 이재가 직접 교정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재는 ‘문장이 전아해 여성의 문체가 아니다’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문장 뿐 아니라 곽청창은 시에서도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최근에 발굴된 여성 시인인 기각은 인물정보가 부족하다. 혼인 후 거주지는 청양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에서 조선 후기 여성시인인 김금원을 조카라고 표현하기 했다.

다만 한시를 한글로 음사하고 한글로 번역한 ‘기각한필’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여성 한시의 한글번역이라는 중요한 문화현상을 말해주는 시집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전의 여성 문인인 김호연재의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것 역시 그의 업적이다.

◆생존 당시 시문집이 편찬된 남정일헌
1840년생인 남정일헌은 결혼 후 예산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우 영민해 세 살 때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 매일 조금씩 한자를 가르쳤고 16세에 혼인할 때에는 경사를 꿰뚫었다고 한다.

그의 시는 ‘정일헌시집’이라는 이름으로 편찬됐다. 이건창의 서문과 이건승의 발문으로 돼 있는데 이건창이 서문을 쓴 시기는 1896년이고 이건승은 발문을 1923년에 썼다. 즉 1922년 눈을 감은 정일헌이 57세 때 이미 완성된 형태의 시집이 도모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역대여류문집’에서도 정일헌시집에 대해서 “이 시집은 그의 사자(嗣子) 성태영이 서문을 얻어 남 씨 졸 후 1년에 편집, 간행한 것인데 앞서 남 씨가 호서에 살 때 갑오 동학농민운동으로 피난 시에 그 시고를 불에 태웠고 그 후 사자에 의해 다시 부초를 거둬 1권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라고 해설했다.

동학농민운동이 1894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일헌의 나이가 55세 때의 일이다, 즉 정일헌이 생존해 있을 때 시문집이 편찬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여성문학사에 굉장히 드문 일로 그녀가 굉장한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된 연기 출신의 김호연재, 이설봉, 창령 성 씨, 신부용당 등 많은 여성문인들이 충남에서 나거나 자랐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참고 ‘충남학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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