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혼으로 뜨거웠던 충남,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다
충의와 절의정신에 의해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백제를 지키려 했던 계백 장군과 백제의 멸망을 앞두고 왕에게 직언을 했던 성충과 흥수, 기존의 학문을 탈피해 실천을 강조했던 예학(禮學), 다른 양반들과 차별화를 꾀했던 선비. 충남을 대표하는 문화들이 융합되면서 새로운 애국정신을 만들어낸 충남은 19세기 말부터 항전을 준비하더니 20세기 들어와 빛을 발한다. 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자 적지 않은 열사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한 활동에 돌입한 것이다. 앞서 소개했던 충남의 5대정신과 문화들이 융합돼 충남에서는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세기 들어와 강력한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양열강세력들이 동아시아에 눈을 들이기 시작했고 일본은 극동 3국 중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군을 재편했다. 군을 통해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계속 선보였고 당시의 국권회복운동은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선비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민중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위정척사론에 입각해 서양 세력과 그 아류가 된 일본의 침략에 항쟁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등 일제 침략에 분노한 시민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항쟁을 벌였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은 조약문에 서명하면 안 된다고 고종(高宗)에게 소를 올리기도 했다. 민영환(閔泳煥) 등은 자결로써 일제침략에 항거했고 나철(羅喆)은 을사조약에 찬동한 대신들을 처단코자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또 개화지식인들은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신교육 및 실업진흥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고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갔다.
한말 충남지역에서도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 자결 순국투쟁이 전개됐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병전쟁이 두드러짐은 충남지역 독립운동의 특성이다.
충남지역에서의 의병투쟁은 홍주의병이 대표적이다.
홍성출신의 김복한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로서 고종을 보필했으나 청일전쟁 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894년 6월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그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에 맞서 일본, 매국적 개화정권과의 일전을 결행하기 위한 의병투쟁을 계획했다. 김복한은 이설과 홍건을 만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고 이승우를 만나 거병을 권했다. 하지만 이승우가 거절하자 김복한은 11월 27일 안병찬을 만나 의병거병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안병찬은 부친인 안창식과 의병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김복한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청양군수였던 정인희 등에게도 글을 보내 의병참여를 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청양의 선비들은 회의를 열고 의병봉기를 결의했고 안병찬 등은 180여 명의 민병을 이끌고 홍주성에 입성했다. 후에 정인희의 부탁을 받고 선비 이창서가 수백명을 데리고 홍주부에 도착했다. 이들의 대장은 김복한이 맡기로 했다.
하지만 거병을 약속하지 않았던 이승우가 김복한 등을 구금하고 서울로 압송했다. 이 중 17명은 무죄로 석방됐고 김복환을 포함한 6명은 이듬해 2월 23일 유배 10년과 징역 3년 등을 선고받았으나 특지(特旨)에 따라 전원 사면됐다.
첫 의병은 큰 활동없이 마무리 됐지만 1906년 의병활동이 다시 전개됐다.
1906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홍주시민들이 봉기했고 안병찬 등은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대장을 맡아달라고 권유했다. 이들은 광수장터(현 예산 광시면)로 진군해 편제를 정비하고 곧바로 홍주성을 공격했지만 관군의 저항과 일본군의 합류로 안병찬 등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민병찬은 부여에서 다시 의병을 재기했고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일본은 홍주성을 되찾기 위해 이틀 뒤인 20일 경찰병력을 보냈고 의병들과 전투를 치렀다. 그럼에도 의병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자 일본은 군병력까지 투입했고 결국 홍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300여 명의 의병들이 사망했다.
홍주성 이외에도 서산과 당진 등 서해안 지역과 공주와 논산, 연기 등 계룡산 일대에서도 소규모 의병을 통한 투쟁은 계속됐다. 특히 당진 소난지도 의병은 충남의 대표적인 국권회복운동으로 손꼽힌다. 소난지도 의병은 홍원식이 인솔하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항일부대로 당진 대호지와 소난지도에 근거지를 두고 해상으로 당진일대의 육지에 상륙해 일본주재소와 관아 등을 공격해 친일파들을 제거했다.
국권회복운동 중 국채보상운동 역시 충남에서 아주 활발하게 진행됐다.
1907년 3월부터 20곳에 달하는 국채보상금 수합소가 충남지역에 설치됐고 지역의 선비들이 이를 주도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1910년 일본은 한반도의 국권을 강탈하고 무단통치를 강행했다. 일본은 헌병경찰과 정규군의 주둔을 증가시켰고 각종 법적 장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교도소 같은 병영국가화 시켰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은 의병 중심에서 독립군 운동의 형태로 변환됐다. 전국에서 민단조합, 풍기광복단, 대한국권회복단의 비밀결사가 조직됐고 충남지역에선 독립의군부와 광복회 등의 비밀단체가 활동했다.
독립의군부는 임병찬(林炳瓚)이 총 대표로 있는 독립운동조직으로 전국 8도에 대표를 둔 전국 규모 단체였다. 임병찬은 1913년 아들과 손자를 통해 각 지역의 애국지사들에게 동지 초모 작업을 벌였으나 조직이 발각돼 실행되지는 못 했다. 이에 충남 대표로 홍주의병의 유병장이었던 유준근이 그 유지를 이어갔고 청양의 안병찬, 면천의 정주원, 예산의 남규진 등이 참여했다.
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기지를 확보한 후 적시에 운동을 벌여 한반도의 독립을 꾀하는 단체였다. 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됐으나 이후 각 지역에 지회를 세웠다. 충남에서는 홍주의병에 참여한 김재정의 장자인 김한종을 책임자로 해 예산과 연기에 곡물상을 두고 거점으로 삼았다. 충남지역 광복회의 활동 중 두드러진 것은 칠곡의 부호인 장승원과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한 것이다. 특히 박용하의 처단은 충남지역 광복회의 책임자인 김한종과 장두환 등에 의해 단행됐다.
풍기광복단 일원으로 활동한 한훈은 호남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동지들이 체포되자 광복단 대표로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지원을 요청하고 활동을 이어 갔다.
이 외에도 조선민족대동단이 연기와 공주 등에 군감을 두고 독립운동을 벌였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대전 등에 지부를 두고 활동했다.
이 시기 가장 눈여겨볼 만한 독립운동은 역시 만세운동이다.
3월 2일 논산과 부여, 3월 3일 대전인동과 예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천안 아우내장터와 공주의 장기와 정안, 당진의 대호지 등 충남 전역에서 봉기했다. 3월 10일부터는 충남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고 27일 이후 확대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만세운동이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횃불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후의 운동은 각 지역에서의 민족계몽운동이 주를 이뤘다. 이는 대개 청년회가 주도적으로 실시했고 조선청년연합회가 대표적인 단체이다. 충남지역에는 홍성과 태안에 지회가 있었고 이들은 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광주학생 운동과 긴밀히 연계돼 있다. 금산지역에서는 금산청년회가 독서회를 통해 민족적인 잡지를 윤독하면서 문맹퇴치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예산에서는 좌익협의회가 독립운동을 펼쳤고 공주에서는 신사참배거부와 일어사용금지 등 활동을 통해 나름의 독립운동을 벌여갔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3·1만세운동 이후 성숙한 역량으로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농촌지역에서의 농민운동도 이 시기부터 활발히 진행됐다. 전국에서 소작쟁의가 가장 많은 지역이 충남이였던 점을 고려할 때 충남에서의 농민운동은 타 지역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소작쟁의, 농민야학, 적색농조운동 등이 펼쳐졌고 면민운동 등을 통해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학생과 농민 중심의 운동과 함께 충남인들의 해외 독립운동, 특히 임시정부 활동도 이때 절정을 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활동한 충남지역 인사들은 윤봉길을 비롯해 이동녕, 이규갑 등이 있다.
윤봉길은 농촌 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상해로 망명해 김구를 만나면서 거사를 맡길 원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거사장소인 홍구공원에서 일본 보자기에 도시락과 수통을 싸고 손에는 일장기를 들고 입장한 후 일본 수뇌부를 향해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이후 윤봉길은 다시 도시락형 폭탄을 던지려 했으나 육전대지휘관 호위병인 고모토(後本武彦) 일등병조에 의해 제압됐고 군중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후 헌병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당시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 모든 나라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중국지역에서 한국 독립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했다.
천안 출신인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임돼 임시정부 조직의 산파역을 수행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을 전폭 지원했다. 그는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통령 대리, 국무령과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이 아닌 만주군 소속으로 무장투쟁에 나선 김좌진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독립항쟁을 이끌었다. 이 외에도 1000여 명에 달하는 충남인들은 항일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인정돼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수여받았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참고 충남학의 이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