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지성들의 운집 '양반의 고장, 충남' 이루다
다섯 가지 충남의 정신이 양반의 고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과거 지배계층 사회에서 양반은 무조건적인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양반의 고장이라는 것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과거 양반은 피지배층으로부터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는 전형적인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졌고 수많은 동화 등에서 양반은 철저히 권선징악을 통해 벌을 받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충남지역 정서는 ‘비가와도 절대 뛰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는’ 융통성 없는 양반들로 표현되는 등 양반의 융통성 없고 줏대 없으며, 속을 절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거 때도 투표소 문전에서 ‘손 가는 대로 찍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더불어 충남은 느림을 상징하는 지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종합해보면 충남, 혹은 양반을 표현하는 이미지들은 대개 부정적이다. 과연 양반의 고장 충남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생겼고 이는 왜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질됐고 이는 전혀 왜곡되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반의 고장 충남이라는 정체성은 어디서 왔을까.
우선 역사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충남은 대체로 어떤 사회적 쟁점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데 이것은 충남이 삼국시대의 접경 지역에 있어서 많은 지배세력의 교체가 잦았다는 지정학적 사실이나 척박하지 않은 자연환경에 기인한다는 식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들어서 예학이 선비가 배워야 할 기본 학문으로 성장하면서 충남지역에서 많은 관료들이 배출되고 이들이 중앙정치에서 영향을 미치자 양반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정국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자 서인세력들이 권력을 잡았다. 당시 서인들은 충남의 대표 인물인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들이 태반이었다.
서인들은 정치적 명분을 살리고 유림의 지지를 얻고자 해 산림을 대거 등용했는데 당시의 산림은 예학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러한 산림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당연히 시대사상(時代思想)에 크게 영향을 줘 17세기를 예학의 시대로 만드는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들의 대부 격인 김장생은 이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많이 했다.
여기에 왕은 김장생을 위해 특별히 사업(司業·성균관의 종4품직)이라는 직을 신설해 유생의 지도를 맡게 했고 연이어서 상의원정, 사헌부 집의를 거쳐 공조참의를 제수했으며, 별도로 강학관이라 칭해 세자교육을 하게 하는 등 중책을 맡겼다. 때때로 왕을 접견케 하기도 했다.
여기에 김장생의 문하생이었던 송시열(宋時烈)이 기호유교를 발전시켰다.
그는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했고, 이것은 조선 후기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체계가 됐다.
이를 통해 그를 추종한 제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들이 송시열의 이념을 계승시켰고 이는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위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이념으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위관료를 꿈꾸는 양반들은 충남에서의 공부를 꿈구게 했고 충남지역의 문인들이 전국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충남에서의 공부는 관료로 가는 지름길이라 할 정도로 많은 양반들이 충남을 찾았다.

◆양반의 고장에서 멍청도로 왜?
양반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이 일 정도로 충남은 모든 유생들이 가서 공부하고 싶은 지역이었으나 이는 변질되고 만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 합병하면서부터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정당치 않은 방법으로 합병하면서 민족말살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세뇌를 통해 일본이 준비 중인 세계전쟁에 조선인들을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민족말살 교육정책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더욱 강화돼 일본은 1938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되던 조선어 교육마저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해 어린 초등학교 학생마저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을 주는 등 언어말살까지 꾀했다.
이와 함께 한글로 발간되는 신문 등을 전면 폐간시켰고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이 밖에도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해 황국신민의 서사제창, 신사참배 등을 강요했는데 이 정책은 조선인에게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될 것과 더 나아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에 양반의 고장이었던 충남은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는가 하면 평화적인 만세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의 형태로 충남에서 시작됐다.
많은 양반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독립군에게 대주는 등 각자의 형편대로 일본군에 대항했다. 이때 새로운 형태의 독립운동이 태어나는데 민족말살 교육정책에 대항한 민족문화 수호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수많은 양반들과 독립운동가들은 학교나 서당 등을 열어 우리 고유의 한글과 역사 등을 일본 몰래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지식층에 속했던 양반들이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태의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다.
양반의 고장으로 불리는 충남의 적지 않은 양반들도 이러한 형태의 독립운동에 대규모로 참여했다. 하지만 민족문화운동은 결국 일본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충남은 일본군의 탄압지역 일순위였다.
때문에 이 지역의 양반들을 와해시키고 이들로부터 유입되는 독립군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서 일본군은 충남지역의 양반들, 혹은 이 지역민들을 왜곡시켰다.
변하는 시대에 맞지않게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살고 있다며 양반들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왜곡된 소문으로 양반이라는 이미지는 곧 융통성이 없고 시대를 읽지 못하는 멍청이 등의 부정적인 형태의 이미지로 변질됐다.
◆변질된 양반의 이미지
양반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일본에 의해 변질됐고 이는 현대에 들어와 고착화됐다. 우선 산업화와 사회운동 참여의 정도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대기업과 일부지역에 특혜를 주는 불균등 성장 및 발전정책을 채택한 기업 위주의 정책을 통한 경제 국가의 대표적이다. 이 성장정책의 혜택을 받은 지역이 있고 그렇지 못한 지역이 있는데, 충청도는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에 속하기는 하지만 강원지역처럼 배제된 지역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충남, 더 나아가 충청지역은 정부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그렇다고 수혜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게 됐다.
노동운동도 자본축적 과정에서의 지역의 정치경제적 토대와 상황을 반영한다. 산업화가 빠르게 이루어진 수도권 등은 노동자들의 공간적 집중이 이루어져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높아지면서 그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운동을 벌였지만, 충남은 이것과도 크게 관련되지 않는다.
또한 사회운동(노동운동 포함) 참여에 있어서도 충남은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다. 주민운동으로서는 충남 안면도의 ‘핵폐기장반대운동’만이 충남의 역사 속에서 주목할 만한 운동이었을 뿐, 이렇다 할 사회운동이라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충남은 아니지만 뿌리가 같은 대전은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대전역부터 옛 충남도청까지 이어진 시위를 꼽을 수 있겠지만 충남은 이보다 더 조용했고 대전 역시 전국에서 열린 대규모의 시위와 비교했을 땐 무척 조용했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충청도 사람들의 지역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지도세력에 대해 큰 불만이 없다는 점을 빌미로 타 지역에서는 멍청도라고 부르는 경우 많은데 오히려 환경에 적응을 하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충남인이 보는 충남과 타지역이 보는 충남의 동질
대개 어떤 지역이든지 자기 지역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하고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를 배제시키려고 한다. 충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충남이 다른 지역과 보이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충남인이 보는 충남의 정체성과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는 정체성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다른 지역의 내부인식과 외부인식 간 차이보다는 훨씬 작다. 즉 충남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스스로 평가하건, 다른 지역에서 평가하건 차이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1997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의 ‘한국인의 안전 의식과 삶의 질에 대한 국민 의식 조사 연구’에 따르면 충남인들은 충남인들에 대해 느긋하다, 소박하다, 온순하다, 둔하다 등을 많이 떠올렸고(복수가능) 78.6%, 70.5%, 66.9%, 57.6%가 여기에 응답했다. 외부인들 역시 각 항목에 대해 90.8%, 90.8%, 86.8%, 86.8%가 같은 순으로 응답했다.
이는 충청도의 지역정체성이 정적이고 소극적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충남인들과 타 지역민들이 꼽은 충남의 이미지들을 보면 부정적보다는 긍정적인 것들에 가까운데 그만큼 충남에 대해 타 지역민들이 충남인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