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대곡리에 자리잡은 이수관

<전남 보성의 광주이씨(廣州李氏) 입향(入鄕) 연유>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전 전라도 보성 한실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에 자리 잡은 이수관(李秀莞, 자는 군서, 호는 양진제)은 감사공 이세정(李世貞)의 다섯째 아들로 1500년(연산경신, 燕山庚申)에 출생했다.
이수관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문학으로 추앙을 받았다.

公(공)이 남하해 보성땅에 자리 잡은 연유는 구전에 의하면 선고(先考) 감사공 이세정이 전라감사(종2품 도지사) 재임 시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보성 조성원에 도착하게 됐다. 그 고을은 산자수려하고 들이 넓고 인심이 온화할 뿐 아니라 앞쪽에는 바다가 보여 매우 살기 좋은 고을이었다.

그 고을 도성면 대곡리 한실에는 전주이씨 이언정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부호로 지내면서 상당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임성부수 이언정(李彦廷)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외동딸만을 두고 있었으며 감사공은 아들 다섯을 뒀는데 다섯째 아들인 이수관만이 미혼이었다.

감사공이 그 고을에 도착하자 임성부수 이언정의 집에 이수관이 머무르게 돼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이수관 시사일(時祀日)에 임성부수 이언정 양위분의 시사(時祀)도 같은 날짜에 외손들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의 보성 종중 자손들이 현재까지도 제사하고 있다.
이수관은 1531년(중종26년 신묘년) 31세 때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해 서사(筮사)로 곡성 임실, 구례, 장성 등 현감(縣監, 종6품 수령)을 역임했다.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유적을 남겼다.
특히 장성현감(縣監, 종6품 수령) 재임 시에는 하서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더불어 도의교우(道義交友)했으며, 말년 관직은 내섬시(內贍寺, 조선시대 각 궁과 전에 대한 공상과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 왜인과 야인에 대한 음식물 공급, 직조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의 판관(判官, 종5품)에 이르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때때로 경(經) 례(禮)를 논하기도 했다. 또 율곡(栗谷) 이이(李珥), 황강(黃岡) 김계희(金繼輝),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등과 같이 형자를 호서에 짓고 도학과 성리학을 강론해 여러 선생들이 항상 친구로서 대접했다. 이들이 강론을 폈던 오현정(五賢亭) 옛터가 해동록(海東錄)에 기재돼 있다.

해동록(海東錄)에 의하면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이수관에게 보낸 서찰에서 말하기를 거년(去年)에 율곡옹(栗谷翁)이 서쪽으로 돌아가고 금년에 이수완(李秀莞)이 남하할 뜻을 갖고 있으니 나의 도가 외롭다 했다.

만년에 부귀를 버리고 홀연이 남하해 보성땅 한실에 자리를 잡고 퇴거해 앞쪽에는 푸른 바다가 보이고 뒤쪽에는 계산천석(溪山泉石)의 승경(勝景) 속에 거가(居家)의 서쪽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어 호를 양진제(養眞薺)라 하고 집의 북쪽에 매월당(梅月堂)이란 정자를 지어 시와 경서를 벗 삼아 여생을 한가로이 보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공이 진위한 매월당(梅月堂) 정자는 헐어 없어지고 그 후 자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매월당(梅月堂) 정자를 중건해 도내 석학 유림 후손 200여 명이 매월당 시회를 조직 매년 4월 9일에는 공을 추모하는 시회를 열고 있다.

이렇게 이수관이 남하해 보성에 정착하게 돼 보성(寶城) 입향중조(入鄕中祖)로 지금까지 약400여 년에 이르렀다. 자손이 크게 번창해 보성을 중심으로 해방 전까지만 해도 20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산업사회의 발달로 전국 각지로 이거해 지금은 700여 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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