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견 아들 이지, 칠곡 최하 딸과 혼인

<칠곡지역 광주이씨(廣州李氏)>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경북 칠곡에도 집성촌(集成村)을 이뤘다.
이극견(李克堅)이 서울에서 성주목사(牧使, 정3품 수령)로 갈 때 그 둘째 아들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데리고 갔다. 팔기현(칠곡의 옛 지명)에 가법을 지키는 최하(崔河)의 딸을 맞아 혼인시키고 있다가 이극견(李克堅)이 내직인 통례원(通禮院, 정3품 아문으로 예절과 의식에 관한 일을 관장한 관청)으로 돌아올 때, 아들 이지(李摯)를 팔기현에 떼어놓고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그 후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하루 아침에 이극견(李克堅)은 종반숙지간 수 십명이 참화를 당했고, 이지(李摯)는 팔기에서 그대로 난세를 벽해 살게 돼 곧 칠곡에 들어 온 입향조(入鄕祖)가 됐다.

후에 이지(李摯)의 현손(玄孫, 고손자) 이윤우(李潤雨)는 정한강(鄭寒岡)에게 사사해 문명이 높았으며 인조 때 공조참의(參議, 정3품 차관보)를 역임했고 성주회연 칠곡사영 회령오산의 3서원에 봉서됐다.
이윤우(李潤雨)의 아들 이도장(李道長)은 한강(寒岡) 정구, 장여헌(張旅軒)에게 사사해 문명이 높았으며 인조 때 부응교(副應敎, 홍문관의 종4품 관직), 사간원의 종3품 사간(司諫)을 역임했고 좌찬성(左贊成, 종1품)에 양관(兩館,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문형)에 증직됐다.

이도장의 장남 이원정(李元禎)은 이조판서(判書, 정2품 안전행정부 장관)를 역임했는데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익이며, 차남 이원록(李元祿)은 백관을 규찰, 탄핵하던 종2품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이원정의 장남 이담명(李聃命)은 이조참판(參判, 종2품 차관)과 경상감사(監司, 종2품 도지사)를 역임했고, 차남 이한명(李漢命)은 홍문관의 교리(校理)를 역임해 4대(代) 사림(士林)을 거친 명문이다.
이 밖에 대(代)를 이어 문명이 높은 많은 인물을 배출(문과 급제 20인)했고 후손들이 지천, 석전, 매원 심천 등지로 널리 퍼져 현재 약 1500호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칠곡지역 광주이씨는 이당을 시조로 하고 이지(李摯)를 입향조(入鄕祖)로 한다.
광주이씨 석탄공파(石灘公派)는 이한희(李漢希)를 1세조(一世祖)로 세계를 계대(繼代)하고, 후손인 이당(李唐)이 광주(廣州) 유수(留守)의 딸과 결혼해 아들 5형제를 뒀는데 5형제가 각각 1세조(一世祖)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에 이원령(李元齡)은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판봉상사(判奉常事)에 이르렀다.
1368년(공민왕 17년) 신돈(辛旽)의 비행을 논박(論駁)하다가 화(禍)를 피해 영천(永川)에 사간(司諫) 최원도(崔元道)의 집에서 피신(避身), 신돈이 처형된 후 복관(復官)이 됐다.
그 후 자손이 대대로 영화(榮華)를 누리고 문호가 크게 번성(繁盛)했으므로 후손들이 이원령을 중흥시조(中興始祖)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고 있다. 본관(本貫)은 조상(祖上)의 세거지 회안(淮安)이 고려 성종(成宗) 때 광주(廣州)로 개칭됐으므로 광주이씨(廣州李氏)라 했다.

좌통례공(左通禮公, 정3품) 이극견(李克堅)이 조선 연산군 초기에 성주목사(牧使, 정3품 수령)로 재임 시 차자가 부친과 함께 따라와서 관내의 만석 부호(富豪)인 영천 최하공(崔河公)의 무남독녀 사위가 됐는데, 일찍 사망해 자손이 그대로 웃갓에서 살게 되니 곧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이며 칠곡에 입향(入鄕)한 중조(中祖)이다.

그 후손이 정착해 450여 년 동안 번성해 돌밭, 매원, 웃갓, 한실 등지에서 집성(集姓)을 이뤄 거주했다. 승사랑공(承仕郞公)의 장자는 진사공(進士公) 이덕부(李德符)이고, 차자는 현감공(縣監公) 이인부(李仁符)이며아다. 장자 진사공의 증손(曾孫)은 공조참의(參議, 정3품 차관보)를 지낸 석담(石潭)이윤우(李潤雨)이고 이윤우(李潤雨)는 영남 유림(儒林)의 대가(大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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