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 토성(土城 )·입향성씨(入鄕姓氏)

칠곡출신 유학자 이도장(李道章)

이도장(李道章, 본관은 광주. 자는 태관, 호는 감호당)은 조선 중기에 칠곡 출신의 유학자이다. 이지(李摯)를 칠곡 입향조(入鄕祖)로 하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의 후손이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1품 외명부 작호) 인천 채씨이고, 부인은 양천허씨이다.

1607년(선조 40년)에 태어나 경학(經學,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하는 학문)으로 뽑혀 성현(省峴) 찰방(察訪, 종6품)에 임명됐다. 연이어 선공감(繕工監, 토목공사 감독관청) 직장(直長, 정7품), 장흥고(長興庫,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조달·관리하던 관청)의 직장(直長, 정7품)에 임명됐으나 곧 사양하고 돌아와 나아가지 않았다.

품성이 총명하고 민첩해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고 여러 어진 이들을 따라 유학하면서 언행을 갈고 닦아 지조(志操)와 행동이 단아하고 확실해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이조참의(參議, 정3품 안전행정부 차관보)에 증직됐다.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에 살았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송곡에 있다. 사헌부의 정5품 지평(持平, 대검찰청 검사)을 지낸 이만운(李萬運)이 비갈(碑碣)을 지었다.

 

단아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이원기

이원상(李元祥, 본관은 광주, 자는 사휴)은 조선 중기 및 후기 칠곡 출신의 유생(儒生)이다.석담 이윤우(李潤雨)의 손자이고 감호(鑑湖) 이도장(李道章)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양천허씨이고 부인은 동래정씨(鄭氏), 청주한씨이다.

이원상(李元祥)은 1666년(현종 7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 돈실(敦實)하고 부모님 가르침에 항상 따르고 옛 전적을 보는데 부지런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에 살았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송정리 도당곡에 있다.

이원기(李元祺, 본관은 광주, 자는 사원)는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文臣)이다.감호당(鑑湖堂) 이도장(李道章)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양천허씨, 부인은 전의이씨, 성주이씨이다.

1610년(인조 10년)에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 종6품)에 임명됐으며, 1683년(숙종 9년)에 세상을 떠나 이조참판(參判, 종2품 안전행정부 차관)에 증직됐다. 사람 됨됨이와 타고난 성품이 단아(端雅)해 명성이 자자하고 성대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에 살았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송곡리에 있다.

 

석담 이윤우 아들 이도장(李道長)


이도장(李道長, 본관은 광주, 자는 태시, 호는 낙촌)은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文臣)이다. 이지(李摯)를 칠곡 입향조(入鄕祖)로 하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이다. 출계(出系)해 주부(主簿,6품 주무관) 이영우(李榮雨)의 후사(後嗣)가 됐다. 어머니는 인천채씨, 부인은 안동김씨이다.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출신으로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張顯光)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식견(識見)이 두루 미치고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넓고 행실이 반듯했다. 1630년(인조 8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 정기 과거) 병과로 급제해 한주(翰注, 조선 시대에 예문관에서 사초를 꾸미던 벼슬인 청요직인 정9품 검열인 한림과 승정원의 주서를 아울러 이르던 말), 전랑(銓郞, 이조의 정6품 좌랑과 정5품 정랑), 삼사(三司, 사헌부, 홍문관.사간원)의 관원을 두루 지냈다.

병자호란 때 사관(史官)으로서 어가를 따랐으며 또한 치욕적인 강화체결(講和締結) 때 청나라에서 척화 주장자(斥和主張者)의 명단을 요구하자 척화 주장자로 이름이 드러난 삼학사(三學士)의 이름만 쓰고 붓을 놓으며 “적(敵)의 요구는 사람 수를 정한 바 없는데, 우리 스스로 많은 사람을 올려 희생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말해 많은 인명을 구했다.

벼슬은 홍문관의 응교(應敎, 정4품)에 이르렀으며, 1644년(인조 22년)에 향년 42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야가 모두 애석해 했으며, 의정부의 종1품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됐다.낙촌집(洛村集)과 남한일기(南漢日記)등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에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비갈(碑碣)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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