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연마을·장수마을, 왜관 매원리
◆경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梅院里)
매원리(梅院里)는 유난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많이 거주한다. 매원리는 의료보험조합에서 지정한 장수마을이며, 금연마을이기도 하다. 이는 매원마을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 중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노인이며, 매원리 전체가 금연지구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원리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중에서 흡연자는 찾아볼 수 없다.
여느 마을과는 다르게 매원마을노인회는 남녀로 따로 구성돼 있는데, 구성원은 대략 100여 명 정도이다. 그중 60여 명 이상이 여성회원이며, 남성회원은 40여 명 남짓 된다.
공식적인 노인회의 구성조건은 연령이 65세 이상이어야 하나, 현재 노인회에 가입한 사람들은 모두 70세 이상이며, 80세 이상이 절반가량 된다. 또한 여성회원의 30% 이상이 90세가 넘는다.

장원방이라 불린 매원리
◆매원리(梅院里)에 터를 잡은 광주이씨(廣州李氏)
“귀암이원정 연속해서 다섯 차례나 향시(鄕試)에 장원, 문과(文科,대과)에 아원(亞元)
동생인 이원록 역시 생원시(生員試)의 장원과 문과(文科, 대과) 을과(乙科)의 아원(亞元)
이원례 역시 향시(鄕試) 장원해 장원방(將元坊)이라 불린 매원리”
4대(四代)가 한림(翰林)을 지낸 조선 시대에서도 드문 명문(名門)인 광주 이씨가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서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 것은 광주 이씨 선조 둔촌(遁村)이집의 증손되는 좌통례(佐通禮, 의례를 담당하던 통례원에 두었던 정3품) 이극견(李克堅)이 약 500여 년 전 성주목사(牧使, 정3품 수령)가 돼 내려올 때 둘째 아들인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는 그 후 팔거현(칠곡의 옛 이름)에서 가법을 지키는 최하(崔河)의 딸과 결혼을 했고, 아버지 이극견이 내직인 좌통례직(佐通禮職)을 제수 받아 한양으로 올라갈 때 부인의 고향인 팔거현, 즉 칠곡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됐다.
승사랑 이지는 이렇게 팔거현에 남아 있음으로써 이극견은 물론이고 숙질 간 수십 명이 하루아침에 참화를 당한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를 피함과 동시에 칠곡(漆谷) 광주 이씨의 입향조가 된다.
이지의 현손(玄孫, 고손자)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한강(寒岡) 이정구(李鄭逑)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문명이 높았다.
인조 때는 공조참의를 역임하다 사후에는 성주의 회연서원(檜演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회령의 오산서원(鰲山書院)에 봉향됐다.
이윤우의 둘째 아들인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 두 분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역시 문명이 높았으며, 인조 때 부응교와 사간원의 종3품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의정부의 종1품 좌찬성(左贊成)과 양관(兩館,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문형)의 증직을 받았다. 이도장(李道長)의 장남인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은 이조판서(判書, 정2품 행정자치부 장관)를 역임했고, 영의정(領議政, 정1품 정승)과 시호는 문익(文翼)을 받았다.
또한 차남인 박곡(朴谷) 이원록(李元綠)은 사헌부의 종2품수장인 대사헌(大司憲,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이원정의 장남인 정재(靜齎) 이담명(李聃命)은 이조참판(參判, 종2품 행정자치부 차관)과 경상감사(監司, 종2품 관찰사)를 역임했다.
차남 이한명(李漢命)은 홍문관의 정·종5품 벼슬인 교리(校理)를 역임하는 등 4대(四代)가 한림(翰林, 예문관에서 사초를 꾸미던 벼슬인 정9품의 청요직인 검열)을 지낸 조선시대에서도 드문 명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