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50을 지천명이라고 한다. 이 말은 지천명이 돼서는 그동안 살아온 삶이 어떻든 간에 이제는 하늘의 명을 깨달았으니 남은 생애는 하늘의 명대로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때부터는 자신의 얼굴도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나이 50이 되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기에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인자한 모습이 얼굴에 배어 있으면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온 것이고, 웃는 얼굴이면 비록 고난과 역경이 많았을지라도 그 고난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잘 견뎌 냈다는 것이란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사람의 도리는 아예 시궁창에 쳐 넣어 버린 듯하다. 사람의 도리 대신 성공만이 정의요, 진리가 되어 버렸다. 이 성공이란 잣대도 얼마나 많은 덕을 쌓았느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느냐? 얼마나 사회에 기여했느냐? 얼마나 정의로운가가 아니라, 가진 것이 얼마 만큼이냐가 가늠자가 돼 버렸다. 불의한 방법이든, 정당한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승리만 하면 성공한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정의가 되고 반대로 가지지 못했거나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모두 불의가 돼 버리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주소다.
이렇게 본다면 대전역 인근 쪽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불의요 실패자요, 이 사회에서 오래전에 폐기처분되어야 하는 잉여인간들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것일까? 이 사회 가치기준으로 보면 폐기처분했어야 하는 사람들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삶에도 나름대로 향기가 있고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안 모 아주머니라는 분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소위 성매매 여성이었던 것이다.(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그 여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전역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였다. 그녀는 어떤 때는 술에 취해 실무자들을 붙잡고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었고, 어떤 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불쌍한 사람이니 벧엘의집에서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부탁도 했었다. 또 어느 때는 조용히 사탕이며, 과자며 가지고와서는 조용히 놓고 가기도 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모든 행동들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란다.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선뜻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다. 단지 목사로서, 사회복지사로서 의무감으로 대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살아오면서 가슴속 깊이 숨겨 두었던 삶의 이력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가 쏟아내는 삶의 이력은 정말 그런 삶이 있을까? 할 정도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호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근거도 부모도 모른 채 50여 년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꿋꿋하고 당차게 살아가고 있었다니….
그녀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현재는 보육원이라고 한다.) 옛날 고아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요즘처럼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저 하루 세끼 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다행스러웠던 곳이 바로 고아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어느 정도 커서는 언니, 오빠들에게 맞기 싫어 고아원을 뛰쳐나왔다는 것처럼 예전의 고아원은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어디든지 이곳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고아원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다. 막상 고아원을 나와 보니 배운 것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는 소녀에게 현실은 너무도 견뎌내기 버거운 곳이었다. 할 수 없이 몸뚱이 하나로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 곳에 정착하는 것도 쉽지 않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중년의 나이가 돼서야 떠돌아다니는 것도 지치고 해서 대전에 정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호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어떡하든 호적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었다.(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마약투약 혐의로 교도소에 갔던 것이 밝혀지면 문제가 될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끈질긴 설득으로 다행히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다. 대전 안씨, 비록 1대로 끊어질 성씨지만 그래도 당당한 대한민국의 성을 갖게 된 것이다. 호적을 만드니 주민등록증도 만들 수 있었다. 안 아무개,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증명서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나니 국가로부터 복지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떳떳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당당히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을 누비며 고물 수집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여인의 삶에서 그 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낸 연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보았다. 또한 그 정도면 세상을 원망할 만도 한데 세상을 원망하기 보다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을 이해하며. 따뜻하게 감싸 안는 사람다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안 아무개 아주머니, 당신의 삶에는 어느 누구도 가지지 않은 당신만의 진한 향기가 있습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