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총장·국무총리 지낸 이수성

이수정(李壽鼎, 본관은 광주, 자는 미백, 호는 매경)은 조선 말기 칠곡 출신의 유생이다.박곡 이원록(李元祿)의 주손(冑孫, 한집안의 대를 잇는 장손자)이고 교리(校理,홍문관의 정, 종5품) 이신영(李臣榮)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여강 이씨(여주 이씨), 부인은 풍산 류씨이다.
1885년(고종 22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사물을 용납하는 도량으로써 사람을 부리는 풍채를 겸했으며, 사람들이 장자(長子)의 기상이라 일렀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에서 살았다. 이충영 아들 이수성은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이수인은 국회의원, 이충영(李忠榮)은 일제강점기 및 건국 이후 칠곡 출신의 법조인이다.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인 이충영(李忠榮)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법조인으로 활동하다 6·25전쟁 때 납북 당해 북한에서 사망했다.
납북 후의 구체적인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남한에 남겨졌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모두 성공함으로써 하버드대학 한국학과 와그너 교수는 ‘한국의 전통명가’라고 평가했다. 이충영(李忠榮)은 1908년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서 광주이씨 이상준(李相駿)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했고, 일본 큐슈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1932년에 졸업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1934년 조선총독부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대구부·함흥부·광주부·평양부 등의 복심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였다.
1943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로 등록해 활동하던 중에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서울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이 북한의 점령 하에 있던 1950년 8월 10일에 납북됐다.
일제강점기에 판사를 지낸 경력으로 인해 체포됐다가 인민군이 후퇴할 때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납북 후 1987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충영(李忠榮)의 장남 이수성은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무총리, 차남 이수인은 영남대 교수와 국회의원, 3남(男) 이수윤은 한국교원대 교수, 4남 이수억은 아더앤드선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이수성(李壽成,1939년 3월 10일~)은 의 법학자이자 대학 교수, 정치가이다. 1995년 서울대학교 총장과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1961년에 학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197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 1970년~1971년에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 교환연구원, 1980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1985년~1989년 한국형사정책학회 회장, 1988년~199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95년에 제20대 총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삼성언론재단 이사장, 12월에 김영삼 정부의 국무총리로 전격 발탁돼 총장직을 사임했다. 1996년~1997년 3월에 노사관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97년 총리 퇴임 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2000년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제16대 총선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2000년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백범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내는 등 대외 활동을 했다. 그 외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여권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결단을내려 12월 13일 후보직 에서 사퇴해 선거중립을 지키기도 했다. 2009년 12월 6일에는 우사 김규식 추모제전에 참석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