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벧엘의집 울안공동체에서 생활하던 가족 한 분이 한 번 자립해서 살아보겠다며 인근에 방을 구해 퇴소했다. 다행히 멀리 간 것도 아니고 인근 쪽방에 월세를 얻어 독립생활을 시작한다고 하기에 쪽방상담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상담소에 등록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한 번 제대로 자립해서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정말 그가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을까? 그의 말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쭉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번에는 큰 결심을 한 것 같아 격려와 함께 앞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했다.
사실 그는 여러 번 자립하겠다며 울안공동체를 들락날락했었다. 울안공동체에 있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어느 정도 돈이 모으기도 하는 등 일정 기간 착실하게 생활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돈이 조금 모이면 자립하겠다며 퇴소를 한다. 처음에는 잘 생활하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주위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거의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다시 울안공동체에 들어와 생활하라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러면 한참이 지나서 다시 울안공동체로 들어온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선 그가 자립해서 생활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 같다. 또한 객관적인 조건으로도 자립은 쉽지 않아 보인다. 건강한 노숙인도 울안공동체에서 생활하다가 자립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 구조상 쉽지 않은데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한 몸도 아닌 장애까지 있으니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녹녹지 않은 상황에서 자립하겠다는 것은 무슨 억지인가? 다행히 안정적인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변변하겠는가? 대부분 급여 수준이 낮거나 임시직이어서 완전하게 자립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립선언을 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구청에서 실시하는 자활근로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자신감이 생긴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그가 자립한다고 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이곳 생활이 무료해졌거나 PC방 알바 등을 통해 어느 정도 돈이 모여졌을 때였다. 그의 자립선언은 거의 무작정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번만은 사뭇 다른 느낌이다. 쪽방상담소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 자활근로도 열심히 하겠다. 그리고 일정 정도 저축도 하겠다.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겠다. PC방도 끊어보겠다. 등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들이 보면 그게 무슨 큰 계획이냐 웃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의 이런 결심이 정말 자립생활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긴 하다. 자활근로를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자활근로를 할 수 없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예전의 일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면 그가 지금 다짐한 많은 것들이 다 무너지기에 예전의 자립하겠다고 했을 때와 다르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염려가 되는 것은 사회구조상 노숙인들이 자활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한 번에 노숙으로 전락한 분들이 아니다. 노숙으로 전락하기 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업에 실패했다고, 실직했다고 곧바로 노숙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업에 실패했어도 다시 재개하여 예전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루는 이도 있고, 실직했어도 재취업을 위한 준비를 꼼꼼하게 하여 다시 취업하는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가난하다고 모두 노숙으로 전락하는 것도 아니다.
노숙으로 이르는 경로를 보면 대부분 주위 관계망이 깨졌거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다가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은 정도가 되었을 때 포기하고 거리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노숙인들은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거나, 신용불량 상태에 있거나,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거나, 사회적 지지망이 무너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패와 좌절, 단절을 경험하면서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왜곡은 때론 분노로, 때론 무책임으로, 때론 자포자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루빨리 자활하라는 것은 억지는 아닌지.
여기에다 정말 더 이상 길이 없는 노인 노숙인도 있다. 이미 나이가 많아 일을 할 수도 없고, 연금도 없고, 다른 벌이도 없는 노인들이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생계급여라도 받아 생활하고 싶지만 비록 관계는 단절되었어도 자녀가 있어서 생계급여 신청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런 분들에게 자활은 먼 나라 이야기인 것이다. 어쩌면 쉼터에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큰 맘 먹고 자립해서 살아보겠다고 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사회적 지지망은 모두 끊어져 있을지라도 안정된 일자리 즉 자활근로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가 꼭 자립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많은 식구들이 자활근로와 같은 국가의 도움으로 자활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