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신안주씨(新安朱氏) ①
中 주자 증손 주잠이 고려로 망명해 정착

<대전시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신안주씨(新安朱氏) 유래>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고대중국의 전욱제(顚頊帝)의 후예로서 주나라를 다스렸던 명문 집안이며 현 중국 강서성의 신안(新安)을 본관으로 하고 성리학(性理學)의 창시자인 성현문공(文公) 주자(朱子) 희(熹)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안 주씨는 주자의 증손인 송(宋) 한림원학사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이 1224년 남송으로부터 7명의 한림원학사와 함께 고려에 망명해 현재의 전남 화순군에 선착하게 된데서 비롯된다.
청계공은 순창 무주 진안 등지를 순방해 서당을 개설하고 성리학을 가르쳐서 조선조 500년간의 사회 문화발전에 근간을 이룩했다.
아들 여경(餘慶)은 고려 때 좌승상(左丞相, 종1품 정승)을 지냈고 손자 열(悅)은 문절공의 시호를 받은 명재상으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주문공의 7세손 인장(印長) 정숙공은 예상부서, 인원(印遠) 문간공은 삼사자윤, 인환(印還)공은 첨의부사의 벼슬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문과급제로 관직에 등용된 이는 30여 명이며 주자학(朱子學)을 전파하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동안 각 지방에 몇 개의 파보가 있었으나 조선조 말에 이르러 월산(月山) 석면공(錫冕公)이 고종황제의 윤허를 얻어 신안 주씨(新安朱氏)로 통합했다.
문헌에 따르면,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新安縣) 사람인 주잠(朱潛, 1194~ 1260년)이 고려 고종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주(羅州)에 정착하면서 그를 1세조로 받들며 계대(系代)하고 있다.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은 유명한 주자(朱子, 본명은 주희(朱熹, 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유학자)의 증손이다. 그(朱潛)는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주여경(朱餘慶)과 섭공제(葉公濟) 조창(趙昶), 진조순(陳祖舜)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錦城, 나주)에 정착해 살았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돼 있다. 원나라에서 송(宋)의 유민을 압송하려 할 때 그는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했다가 여러 곳으로 이주해 지명에 따라 다르게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 나주(羅州), 능성(綾城) 등 45개 파(派)로 갈리게 됐다고 한다.
서기 1902년(고종39년, 광무6년) 의정부의 찬정 주석면(朱錫冕)의 상소에 의해 주잠의 후손들은 모두 본래 선조의 관향인 신안(新安)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결국 주씨(朱氏)의 본관이 신안(新安), 나주(羅州), 능성(綾城), 웅천(熊川, 공주), 공주(公州, 웅천), 전주(全州), 압해(押海) 등 무려 107본(本)까지 전하고 있으나 모두 신안 주씨(新安朱氏)에서 분파된 것이다.
<도통사(道統祠)>
도통사(道統祠)는 1932년 남송(南宋)의 대유학자 주희(朱喜)의 30세 후손 주병렬(朱秉烈)이 중국에서 주희의 영정을 모셔와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산성동에 있는 사저에 봉안했다가 1935년 사우(祠宇) 1동과 강당을 건립하고 도통사(道統祠)라 칭했다. 1936년 3월 사우에 주희·주잠(朱潛)·주열(朱悅)의 삼현을 봉안하고 입묘제(入廟祭)를 거행했다. 1994년 9월 신안 주씨(新安朱氏) 문중의 도움으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한 뒤 사우와 삼문(三門 ) 및 담장을 신축하고, 강당을 중건했다. 솟을대문 삼문을 통과하면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인 사우가 나오는데, 전면에는 툇간을 두었으며 내부는 통간으로 막힘없이 통하도록 했다. 매년 음력 3월 9일 향사(享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신안 주씨(新安朱氏)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주잠의 아들 주여경(朱餘慶)이 고려 고종 때 은사과(恩賜科, 왕이 내려줌)에 올랐고, 주여경(朱餘慶)의 아들 주열(朱悅)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원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 정5품 벼슬)으로 충청·경상·전라도의 안찰사(按察使,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 자세히 보살펴 조사하는 임시벼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생활이 검소해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려시대 문신가운데 뛰어난 학자로 한림원 등의 종2품·정4품)를 지내고 판도판서(版圖判書, 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의 정3품 장관)에 이르렀으며 충렬왕 때는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 종1품)에 이르러 능성군(陵城君)에 봉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