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의 회고와 전망) - 희망진료센터 총회 인사말

정부는 IMF경제체제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 쉼터제공, 공공근로를 통한 일자리제공 등 긴급구호지원을 통해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노숙인 문제는IMF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긴급구호만으로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즉 대량실직 사태로 인해 실직자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기에 안정된 일자리만 제공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숙인문제가 단순히 대량실직으로 생겨난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에서 생겨난 사회적문제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무한경쟁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사회보장제도가 꼼꼼하지 않은 우리사회는 당연히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노숙인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노숙인들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듯 노숙으로 전락하는 원인이 실직, 저학력, 가정해체, 뒤떨어지는 산업기술 등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질병이 또한 중요한 노숙으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병에 걸린다고 모두 노숙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질병은 곧 파산선고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가계소득의 40%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해 의료비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파국적 의료비지출 가구가 가장 많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약 40만 가구, 1.98%로 OECD평균(0.68%)의 세배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파국적 의료비 지출가구가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서민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이 전체 병상이 10%도 되지 않고 비록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비급여가 많아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려도 쉽게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는 순간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질병이 노숙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노숙인의 건강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노숙인들은 공공의료체계가 너무 허술해 병에 걸려도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을 키우거나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벧엘의집이 노숙인 사역을 시작하면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희망진료센터를 만들게 된 것이다. 17년 전, 거리노숙인과 쪽방주민을 위해 진료장비 하나 갖추지 않고 시작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만으로 출발한 무료진료소 희망진료센터가 올해로 18살이 됐다.

당장 무료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에 출발은 했지만 무료진료소가 없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이기에 빨리 없어지는 기관이 되자고 했다. 빨리 없어지는 기관이 되기 위해 출발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의료장비도 늘어나고 인력도 늘어나고, 예산도 늘어나는 등 없어지기는커녕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또한 우리사회는 여전히 돈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없어지고 싶어도 없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인가?

어쩌면 빨리 없어지는 기관이 되자고는 했지만 없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스스로 몸집을 키운 것은 아닐까? 이런 기관이 없어도 되는 사회를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해 본다. 어떤 이유든 없애고 싶어도 없앨 수 없는 현실이다. 빨리 없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공공의료를 확대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의료를 시장의 논리에 맡기려는 것을 막아내고, 의료는 그 자체가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는, 돈 보다는 생명을 우선하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17년 동안 한결같이 비를 맞는 이에게 조용히 다가가 함께 비를 맞으며 비를 피할 방법을 모색한 희망진료센터 동지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올해도 희망진료센터가 없어지기 위한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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