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와 한나라의 멸망⑫

동행하고 있던 궁녀도 안달이 나 있었다. 누가 지켜보는 가운데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 자체가 흥미를 더했다. 쉼 없이 허공을 향해 발버둥을 쳤다.

그녀는 곁눈질로 승상과 무희의 놀음을 관찰했다.

무희는 스스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승상의 품에 안겨 속삭였다.

“승상폐하. 너무 고통스럽사옵니다. 소녀의 아린 가슴을 녹여 주시와요.”

그 말에 승상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그녀의 가슴을 향해 고목처럼 쓰러졌다.

한 왕이 진땀을 흘리며 가파른 산의 정상을 막 오르려는 참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밖에 있던 내관이 침전 문을 두드렸다.

“대왕마마. 화급을 다투는 전갈이 왔사옵나이다.”

문밖에서 내관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뭐 그리 급한 전갈이 왔다고 호들갑이냐.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이냐?” 한 왕은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하옵나이다. 진나라가 기어이 쳐들어오고 있다 하옵나이다.”

“뭐라. 진나라가 쳐들어오고 있다고?”

화들짝 놀란 한 왕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앞섶을 가렸다.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승상도 휘둥그런 눈으로 한 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소상히 고하렷다.”

한왕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며시 몸을 내리는 승상을 넘어다보며 말했다.

“대왕마마. 진나라 장군 내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이곳 양책성으로 몰려오고 있다 하옵나이다.”

“뭐라. 파죽지세로 몰려와. 우리 장군들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그리 몰린단 말이냐.”

한 왕은 부리나케 자리를 걷고 일어나 조정으로 나아갔다.

조정에는 벌써 중신들이 모여 숙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책이 없었다. 진나라의 병사들이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는 판이라 대안을 찾지 못했다. 전선에서는 연신 패전 소식만 전해져왔다.

한 왕은 버선발로 대전을 오가며 어쩌면 좋겠느냐고 중신들을 다그쳤지만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만 확연히 들어왔다. 그제야 한 왕은 땅을 치며 한탄했다.

“누백 년 쌓아온 사직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진단 말이냐. 먼저가신 선왕들을 무슨 면목으로 뵈올꼬…….”

한나라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진나라 병사들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한 왕이 진나라 장수 내사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기원전 230년, 진왕 영정의 즉위 17년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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