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한 굉음과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뚫고 벌건 쇳물이 마치 작렬하는 태양처럼 용솟음친다.만물을 녹여버릴듯한 힘찬 기세로 펄펄 끓어넘치는 쇳물을 보며 이 사회의 모든 갈등이 융해되길 바라는 마음이 든 것은 세월이 하 수상하기 때문일까…#1. 그곳엔 뜨거운 해가 타오른다봄이 실종된 것처럼 찬바람이 불던 지난 4월의 마지막 날,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를 타고 서해안 수부도시로 도약하는 당진을 향하는 길은 다소 유쾌하지 않았다. 최근 군정(郡政)을 이끌던 수장의 비리가 발각되며 불명예를 안게 된 지역민에 대한 왠지 모를 무안함이 가슴 한켠을 무겁게 했지만 국내 두 번째로 준공된 일관제철소를 취재한다는 사실은 묘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유성IC에서 출발해 1시간을 달려 송악IC로 접어든 후 10여 분을 더 달리자 당진군 송악읍 고대리에 자리한 현대제철에 안착했다. 일관제철소 준공을 계기로 국내 철강산업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현대제철 당진공장. ‘일관(一貫)제철소’란 제선, 제강, 압연 등의 공정을 모두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제철소다.제선은 원료인 철광석과 유연탄 등을 커다란 고로에 넣어 액체상태의 쇳물을 뽑아내는 공정을, 제강은 이렇게 만들어진 쇳물에서 각종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압연은 쇳물을 슬래브 형태로 뽑아낸 후 여기에 높은 압력을 가하는 과정이다.다시 말해 일관제철소는 고로(용광로)에서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든 후 자동차용 강판 등의 철강 제품을 원스톱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철소를 지칭한다. 여의도 면적의 2.5배에 달하는 740만㎡ 부지에 위풍당당한 공장 건물과 대규모 생산설비, 각종 중장비에 압도당하며 들어선 현대제철의 위용은 웅장함 그 자체였다.세계 최초로 밀폐형 원료처리시스템을 갖춘 거대한 원형돔이 장관을 이루고, 일관제철소의 심장부인 연간 조강(粗鋼) 생산능력 400만 톤 규모의 고로는 범접하기 힘든 신성함마저 느끼게 했다. 철광석 등을 수송하기 위해 공장 외부에 설치된 컨베이어벨트 길이가 35㎞에 달한다는 직원의 설명에 놀라는 순간, 기차역 플랫폼에서 들려올법한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700톤의 쇳물을 가득 실은 어뢰 모양의 토피도카(Torpedo car)가 레일을 타고 힘차게 들어섰다.8.3㎞에 걸쳐 설치된 전용 철도를 따라 쇳물을 실어나르는 토피토카 외에도 현장에는 철강도시 당진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하는 장치들이 가득했다.‘아! 이곳이 지역경제와 국가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서해안 철강벨트의 발전축인가…’대한민국 신성장동력의 거점으로 부상하는 당진은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곳엔 뜨거운 해가 타오르고 있었다.#2. 꺼지지 않는 불꽃지난달 8일 준공식을 가진 현대제철 일관제철소는 올 초부터 1기 고로를 가동한 데 이어 오는 11월 2기 고로를 가동할 계획이다. 아산?평택과 어우러져 철강벨트를 형성하는 당진에는 매년 200여 개의 연관기업이 입주하며 지역경제를 살찌우고 있다. 공장과 인접한 당진·평택항은 서해안에선 유일하게 20m 이상의 수심을 유지해 20만 톤이 넘는 초대형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점은 이곳을 중심으로 철강클러스터가 구축된 요인 중 하나다. 천안함 침몰과 당진군수 구속, 청양 구제역 발생 등으로 어수선한 세월이지만 소결광(철광석)과 코크스(석탄)를 원료로 용선(쇳물)을 생산하는 고로는 언제나 그랬듯이 펄펄 불타오르고 있었다.“천안함 침몰로 많은 해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은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산업의 불꽃은 꺼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한국 철강산업의 제2의 도약을 선포하는 자리에 왔습니다.”준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축사 서두에 이 같은 멘트로 일관제철소 가동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는데 그의 말처럼 화씨 2300도까지 뜨겁게 달궈지는 고로는 쉼없이 국가경제의 맥박을 뛰게 하는 에너지원으로 심한 해풍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서 있었다.모든 산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용광로 쇳물부터 제조업의 총아인 자동차까지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로소 보유하게 된 현대제철은 그간 포스코가 독점했던 국내 일관제철 분야에서 본격적인 경쟁을 펼치게 됐다.#3. 꿈은 이루어진다민간자본으로 설립된 국내 최초의 고로제철소이자 제철 원료에서 제품 생산까지 친환경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녹색제철소의 탄생. 현대제철은 1953년 전신인 대한중공업공사로 국내 최초의 철강업체로 첫 발을 내디딘 지 57년, 1973년 국내 첫 고로가 쇳물을 쏟아낸 지 37년 만에 한국 철강사에 민간기업 최초의 고로제철소 준공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3년 2개월에 걸친 당진 일관제철소 건설에 6억 2300억 원을 투입한 현대제철은 올해 말까지 자동차강판 외판재 개발을 마무리하고 2011년부터 양산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다. 현대제철이 열연강판을 생산하게 되면서 현대차그룹은 세계 최초로 자원순환형 그룹으로 탄생하게 됐다.현대제철이 생산한 열연강판을 소재로 인근에 자리한 현대하이스코가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만들어 현대기아자동차를 생산하고, 수명이 다한 자동차는 리사이클링 센터에서 폐차 처리돼 다시 원료로 재활용되는 자원 순환고리가 완성된 것.일관제철소 건설은 고(故) 정주영 회장 시절부터 현대가의 숙원사업이었다. 정 회장은 1978년 인천제철 인수 후 일관제철소 건설에 도전장을 던졌고, 1990년대 들어 전남 광양, 부산 가덕도, 경남 하동 등에서 세 차례에 걸쳐 설립을 추진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고로가 없었던 현대제철은 그간 철광석보다 비싼 고철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전기로만을 가동, 생산성과 성장 잠재력에 한계가 있었다. 창업주의 숙원은 정몽구 회장에까지 이어졌고, 정 회장은 자동차 사업을 세계적 규모로 확장하려면 고급 자동차용 강판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신념으로 당진 제철소 완공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일관제철소를 보유하겠다는 꿈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던 현대제철은 결국 57년 만에 세계 최대 내용적(5250㎥)의 고로를 완성, ‘3전4기’로 꿈을 실현했다.최 일 기자 choil@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