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악당열전

◆호랑이를 피할래, 사자를 피할래?
스킬라(Scylla)는 암초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탈리아 지도는 장화가 공을 차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장화 코와 공 사이엔 3km의 좁은 해협, 메시나 해협(Strait of Messina)이 있다. 이곳을 지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도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살도 빠른데 숨겨진 바위가 있으니 저세상으로 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가려진 바위를 우린 ‘암초(暗礁)’라고 한다.
스킬라는 바다의 요정이지만 요괴에 가까웠다. 처음엔 아름다운 요정이었지만 키르케(Circe)의 저주 받은 독초를 마시곤 상체는 예쁜 처녀, 하체는 여섯 마리의 개로 변해버렸다. 하필 키르케가 사랑한 이가 스킬라를 사랑하는 바람에 질투가 나서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역시 삼각관계 속 질투만큼 무서운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나보다.
스킬라는 조합이 안 되는 괴물이었는데 영화 명량 속 거센 울돌목, 위험한 암초를 보고 삼중 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여섯 마리의 개로 표현한 것 같다. 그녀는 안 그래도 좁은 그 바다에 숨어 있다 괴물이 된 한(恨)을 사람에게 풀다가 헤라클레스(Hercules)에게 맞아 죽어 바위가 됐다. 미션을 수행하기위해 게리온(Geryon)의 소를 헤라클레스가 미케네(Mycenae)로 가져오고 있었는데 스킬라가 그 중 몇 마리를 꿀꺽했기 때문이다. 미션 실패에 화가 난 헤라클레스는 다 먹지 않고 일부만 먹었다며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었던 스킬라를 죽이고 말았다. 스킬라도 사람을 봐가면서 건드렸어야 했다. 하필이면 악당보다 더 독한 성질머리를 건드렸으니 죽음은 어쩌면 당연했다.

스킬라는 이렇게 메시나 해협의 바위가 되는데 이 암초를 그리스말로 ‘리자(ριζα)’라고 부른다. 지금의 경제용어인 ‘리스크(risk)’의 어원은 여기서 왔다. 어차피 손해를 봐야한다면 어떻게 최소의 피해를 볼 것인가를 제대로 판단하는 게 위기를 견디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Odysseus)는 스킬라 앞에 있던 소용돌이 괴물 카리브디스(Charybdis)에게 메시나 해협을 지나면서 선원 6명을 내줬다. 선원 전원이 몰살되는 걸 막기 위해 이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나머지 생명들을 살린 것이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다
아이티 부근 카리브 해를 보면 해적이 생각난다. 실제 카리브 해는 700여 개의 암초가 빽빽이 박혀있다. 그 사이를 빠져나오는 급한 물살 때문에 운항을 할 땐 배를 천천히 몰아야했다. 그때 해적이 섬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덮쳐 도둑질을 일삼았는데 그 도둑이 바로 ‘젝스페로우(Jack Sparrow)’였고 그 섬 사이 빠른 물살이 오늘의 주인공 카리브디스다.
카리브디스는 와류 또는 급류, 소용돌이를 생각하면 된다. 가이아(Gaia)와 포세이돈(Poseidon) 사이에서 태어난 카리브디스는 항상 배가 고팠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올림포스에서 넥타르(Nectar)와 암브로시아(Ambrosia)를 닥치는 대로 먹다가 신들을 굶게 만들었다. 그 꼴이 보기 싫었던 제우스(Zeus)가 번개를 날렸고 카리브디스는 바다로 떨어져 급물살이 됐다.

많이 먹는다고 조카를 번개로 때린 찬란한 인성의 제우스였다. 바다로 떨어진 카리브디스는 허기를 참지 못하고 하루 세 번 바닷물을 빨아들였다가 곧 뱉어냈다. 이 어마 무시한 소용돌이에선 살아남을 배가 없었다. 게다가 그 좁은 해협에 암초 스킬라도 살고 있으니 그 사이를 지나는 인간들은 죽을 맛이었을거다. 서양 속담에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로 지나간다’는 속담이 있다. 바로 어느 쪽도 안심할 수 없이 힘든 상황이라는 뜻이다. ‘좌(左) 호랑이 우(右) 사자’ 정도 상황이라고 보면 맞다.
그리스의 또 다른 영웅이었던 이아손(Iason)은 이올코스(Iolcos)를 출발해 콜키스(Colchis)로 향하는 항해를 했다. 몸 지도로 살펴보면 왼쪽 겨드랑이에서 팔꿈치로 가면 되는 항로다. 그런데 굳이 이탈리아, 그러니까 옆 친구 오른쪽 발까지 갈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바다를 헤맨 게 아니면 이아손의 아르고스(Argos) 원정대는 왜 이탈리아 시칠리아까지 간 걸까?
먹어도 너무 먹던 카리브디스는 허기는 좀 채웠는지 모르겠다. 물 배라도 채워라. 근데 너무 먹으면 밉기는 하더라. 미운 게 많이 먹으면 더 밉기도 하더라.

◆한 판 붙자
아미코스(Amycos)는 베브리케족의 지도자였다. 왕이라 말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부족장급이었다. 섬에 들른 모든 이들에게 복싱 한 판하자며 덤비곤 했다는데 싸움을 좀 하는 모양이었다. 이아손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제우스의 아들 폴리데우케스(Polydeuces)를 내보냈다. 올림픽 복싱 챔피언이기도 했던 그는 씨익 웃으며 나가 아미코스의 머리를 박살낸다. 코피를 낸 것도 아니고 머리를 부숴버렸다. 진짜 그런가 싶어 찾아보니 실제로 짓이겼단 표현이 맞았다. 까불다 이럴 줄 알았다. 언제나 나대면 안 된다는 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신화 속 한 장면이기도 하다.
여행길에 만나는 뜬금포들은 참 다양하다. 실 한 오라기를 팔에 걸어주고 돈을 뜯고, 비둘기 모이를 주곤 돈을 요구하고, 짐을 들어준다고 하고 가방 들고 도망가기도 했다. 인도에선 호텔에 들어가 기둥에 가방을 쇠사슬로 묶어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직원이 가방을 들고 날라버리거나 짐을 뒤지는 일이 그 곳에선 흔한 일이었다. 너무 친절한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인데 굳이 외국인인 나에게 간절히 길을 묻는 그녀의 손은 이미 나의 지갑을 더듬고 있었다. 어떤 인자한 도둑놈은 지갑을 훔치면서 여권은 다시 돌려줬다. 그것도 상량하게 말이다. 주웠다던 그 놈이 도둑놈이었다. 출국 세 시간전 지하철에서 나는 이렇게 간을 밖으로 뺏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한번은 실시간으로 가방 낚아채는 놈을 잡기도 했는데 왜 그랬냐 물으니 편안한 얼굴로 “my job! why not?” 이란다. 부처가 된 나는 이제 화도 안 나고 알아서 조심한다. 한국에선 식당에 자리를 맡기 위해 휴대폰이나 가방을 내려둔다. 그러나 여행 중엔 그 순간에 사라진다. 사이드 백은 크로스로 메고 손으로 가방을 잡는 게 여행 상식 중 상식이다.
아니 뭐 지갑이나 여권도 한번쯤은 잃어버려봐야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다 헛소리다.
이렇게 모든 걸 잃고 홀로 한국 대사관에 힘겹게 찾아가면 유명한 환대가 이어진다. 어쩜 그렇게 아는 척도 안하는지. 나는 하늘이 무너졌는데 그들은 눈길 한번 안준다. 동네 주민센터만 가도 얼마나 친절한데 대사관은 외국이라 그런 모양이다. 대사관 복도처럼 재밌는 곳이 있을까. 모두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초췌한 얼굴로 머리를 벽에 짓이기며 하늘 뚫리고 세상 망한 얼굴로 앉아있다. 그 풍경, 참 놓치기 아깝다. 그 바보 중 가장 침통한 게 나였지. 나도 복싱 배운다 이것들아!
글·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