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었던 친구가 날 배신했다면, 그렇게 나와 아이에게 잘했던 남편이나 아내가 혼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았다면, 아니면 말도 안되는 사기를 당한 경우 분노의 감정을 터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경우 화산이 폭발하듯이 화를 낸 다음에 이내 고요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용암이 흘러내리듯 화가 채 풀리지 않거나 아니면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화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러다 화병에 걸리기도 한다. 눌러도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것이 화병이다. 어떤 사람을 종교를 찾아 어떤 사람은 운동을 통해 또 어떤 사람은 명상을 해서 화를 풀어보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타자에 당한 억울한 감정의 축적덩어리’가 화병인데 그 화살은 타자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향한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위해 노력한 끝에 만나는 것은 ‘너의 마음을 응시하라’라는 도덕적 계율이다. 부정적인 사건에서 만이 아니라 인생의 선물인 사랑처럼 긍정적인 사건에서도 감정은 요동친다. 젊은 베르테르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은 천당과 지옥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게 만든다.
마음에서 분출하는 감정의 회오리를 돌보라, 그것이 삶의 쾌락과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설교한 인물이 바로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 ~ B.C 271)이다. 그는 오늘날 감정 다스리기와 관련된 수많은 심리학 저서의 원조 중 원조이고 최초의 대중심리학자이다. 그의 감정생활과 관련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명문가 출신이라고도 하고 비천한 가정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감정생활에 대한 단서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학교생활을 할 때 선생들의 따분한 수업방식과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선생들을 보고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학교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교사들의 수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표출된 그의 생애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후 그는 스스로 선생을 하면서 우리가 아는 원자론의 주인공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을 접하였고 본격적인 철학의 길로 들어선다. 데모트리토스 철학에 대한 열광이 그로 하여금 평생 철학에 몸담게 한 것이다. 좌절과 분노 이후의 인생을 바꾼 열광의 사건이며 이 열광은 철학에의 열정과 철학함의 즐거움이라는 쾌락 감정을 평생 간직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이 들어서도 철학하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는 그의 권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삶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통과하게 되는 폭풍우와 같은 사랑의 열정을 그도 경험했다. 에피쿠로스도 젊은 나이에 그 환희의 터널을 통과했다. 그는 사랑의 열병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를 비난하는 당대의 인물들은 그가 수많은 창부들에게 보낸 편지 50통을 공개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연서는 남자들이 사랑의 격정에 빠졌을 때 여성에게 보내는 찬미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위의 편지들이 사실이라면 그는 누구보다도 실천적인 충실한 아리스티포스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다. 그 이야기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인생에서 젤 중요한 것이 감정이다. 감정이 삶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감정 중에서도 최고의 감정인 쾌락의 감정을 즐길 것을 강하게 권유한다. 그는《메노에세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쾌락(의 감정)은 축복받은 삶의 시작과 끝이다”, “쾌락은 우리 인간의 최초의 선이자 공통적인 선이다”, “쾌락은 우리의 모든 선택과 혐오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라고 적고 있다. 쾌락의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라는 이야기이다. 쾌락=퇴폐=타락이라는 의미도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쾌락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의 생각을 음미해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쾌락의 감정,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처럼 생각되는 이유는 쾌락이 현실에서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의하듯이 즐거움의 감정을 유발하는 “쾌락이 그 자체로서 유쾌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쾌락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주가라고하여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매일 ‘부어라, 마셔라’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즐거운 감정의 영속성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꿈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그런 즐거움의 감정을 항상 가질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편 우리 주위에서 다이어트를 위해 가장 좋아하는 콜라나 탄수화물을 먹지 않는 사람, 건강을 위해 30년을 피운 담배를 끊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은 명절과 주말을 반납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모든 고통이 나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회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위의 경우에 해당된다.
더 큰 성취의 즐거움을 위해 당장의 쾌락을 유보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성적 판단의 개입이다. 이성은 더 큰 쾌락을 위해 혹은 더 가치 있는 즐거운 감정을 얻기 위해 쾌락을 구분하고 즐김의 여부를 판단한다. 이런 생각에서 에피쿠로스는 이성을 통해 “쾌락과 고통을 비교측정해 이익과 불이익에 눈을 돌림으로써 이런 모든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어떻게 쾌락을 구분하고 비교·측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의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영국인 벤담은 14가지의 단순쾌락과 12가지의 단순고통을 나누며 강도(intensity), 지속성(duration) 확실성(certainty), 근접성(proinquity), 다산성(fecundity), 순수성(purity), 파급범위(extent) 등 7가지를 기준으로 쾌락계산법을 소개했다. 공리주의자라고 보기에 의심스러운 벤담의 후계자인 밀은 ‘영속성, 안정성, 저비용성’이 더 좋은 쾌락인지 그렇지 않은 쾌락인지를 구분하는 척도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가 벤담이나 밀처럼 쾌락의 계산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영국인들의 생각했던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에피쿠로스가 최고의 쾌락의 감정을 얻는 방법은 이성을 통한 방법이다. 그는 “모든 욕구와 회피의 근거를 파악하고 영혼을 회오리 바람처럼 뒤흔드는 광기를 몰아내는 명료한 사고만이 쾌락적인 삶”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후대 사람들이 정신적 쾌락주의자라고 딱지를 부치는 단서가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성이 개입된 최고의 쾌락은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이다. 육체적 고통이 없는 상태인 아포니아(aponia)와 마음이 평정한 상태인 아타락시아(ataraxia)가 최고의 쾌락의 감정을 낳는다. 마음의 평정 혹은 고요함은 “어떤 형태의 마음의 불안이 없는 상태”이다. 우리가 돈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상태이고 언제든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으며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감정의 관리와 막연한 근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포니아와 아타락시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폭발적인 기쁜 감정이 아니라 조용하게 미소 짓는 잔잔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아타락시아의 상태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그가 말하는 육체적 고통과 마음의 불안이 없는 편안한 감정을 누리는 상태는 과연 가능할까? 우문이다. 당연히 가능하지 않다. 즐거움에 대한, 쾌락에 대한 욕망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 직장에 가서, 심지어 동호회나 지인모임에 가서도 얼굴을 붉히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를 에피쿠로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회적 관계에서 고요한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는 방법으로 정의와 우정을 제안한다. 정의란 “언제 어떤 장소에서 사람들이 만나든지 간에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 서로 해를 입히지도 말고 당하지도 말자는 계약”이 실현될 때 생긴다. 서로 피해주지 않으면 정의는 성립한다. 2017년 11월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블린 필하모니 공연이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다. 관객 중에 연주를 몰래 촬영하다 소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와 같은 관객이 없었다면 지휘자인 래틀 경과 단원 그리고 관객 사이에 고통이 부재한 에피쿠로스적 정의가 실현됐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확인되듯이 ‘정의의 열매는 마음의 평화’이다. 사회적 관계 맺기에서 즐거움의 감정을 가질려면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사람과의 우정이 쌓여야 한다. 직장인들의 대다수는 ‘일하는 것 보다 인간관계로 스트레스 받는다’라고 하소연이다.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 동료애가 서로 잘 확인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의 감정인 쾌락을 얻기 위해 우정을 추구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그런 사람을 “고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정을 쌓아 관계에서 오는 마음의 피로와 고통을 없애려는 모든 사람이 고상한 사람인 셈이다. 우정은 한 사람이 잘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갈등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고 그것을 안고 가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사람들에게 에피쿠로스는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는 주문을 외부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과감하게 떠나라’라고 말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즐겨야하지만, 한게가 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사회를 떠나고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해 마음의 평화를 가지라고 말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해결책은 참 쉬운 얘기에 불과하다. 그의 당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그것도 그와 같은 특수 직종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다.
에피쿠로스는 사회적 관계에서 마음의 고요함에서 오는 조용한 즐거움 추구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감정생활에서 마음의 안정, 평정심, 고요함을 찾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가 사회심리학자의 모습에서 개인심리학자로 변신을 시도한다. 에피쿠로스는 개인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발견하고 가능한 그것을 피해 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미신과 편견이 원인이 되는 마음의 동요, 운명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라고 파악한다. 타로나 사주팔자, 오늘의 운세나 각종 점을 보는 것, 운명이 있다는 믿음은 불안심리의 표현이며 그러한 불안심리는 자기운동을 한다. 불안1→ 운세/타로/점→ 불안 혹은 평안 → 불안2의 운동으로 진행된다. 최초의 심리학자인 에피쿠로스는 이것을 어떻게 치료하려고 했을까. 인간의 불안이 대부분 무지와 미신에서 오는 마음의 병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상상과 분석 없는 상념’이 마음의 병을 키우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에피쿠로스도 그것을 염려하며 평점심을 찾도록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신, 편견, 운명에 대한 잘못된 믿음보다 언제든 불안감정의 회오리를 불러오는 가장 강력한 대상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래서 감정치료사 에피쿠로스는 이 죽음에 대한 불안감정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은 찾아냈다. 그의 치료방식은 환자의 무지를 알려줌으로써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는 환자 앞에서 말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아무 연관이 없다”고. 에피쿠로스는 왜 살고 있는데 쓸데없이 죽음을 걱정하며 알지도 못하는 죽음 이후에 대해 불안해하냐는 말하는 것이다. 살고 있으면서 미래의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만들 이유도 없으며 죽음 이후는 아무 감각도 없는데 뭘 걱정하느냐는 이야기다. 말귀를 알아듣는 환자라면 에피쿠로스 말을 듣고 옅은 웃음을 짓겠지만, 잘 못 알아듣는 환자에게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두려워 하지마,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을 생각해봐.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고 있었을 때를 떠올려 봐. 죽음의 불안을 다스리게 되지’라고 말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