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 명예교수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

권섭의 「황강구곡가」 ‘하늘이 뫼를 열어’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는 1752년(영조 28) 82세 때 옥소 권섭이 황강을 배경으로 백부인 한수재 권상하의 뜻을 시가로 남기고자 지은 구곡체의 연시조다. 총 10수로 권섭이 지은 시조 75수 중 가장 나중에 창작됐다.

권상하는 1675년 송시열이 유배를 가게 되자 남한강 상류에 있는 제천 황강으로 은거, 그곳에서 44년간 윤봉구, 한원진, 이간,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 등 황강팔학사를 비롯해 그 외 많은 학자들을 길러냈다. 황강은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있는 남한강과 월악산이 어우러진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권상하가 주자학으로 일가를 이룬 곳이다.

권섭은 굽이굽이 펼쳐지는 황강의 경치를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여기에 자신의 흥취를 부쳤다. 첫째 수는 도입부이고, 1곡은 대암, 2곡은 화암, 3곡은 황강, 4곡은 황공탄, 5곡은 권호, 6곡은 금병, 7곡은 부용벽, 8곡은 능강, 9곡은 구담이다.

하늘이 뫼를 열어 지계(地界)도 밝을시고

천추(千秋) 수월(水月)이 분(分) 밖에 맑았어라

아마도 석담파곡(石潭巴谷)을 다시 볼 듯하여라

도입부 여기에 작가의 창작 의도를 밝혔다. 하늘이 산을 열어 땅의 경계가 밝을시고 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물과 달이 분 밖에 맑았어라. 아마도 석담파곡을 다시 본 듯하여라. ‘밖에 맑았어라’는 것은 ‘외청(外淸)’을 말하는 듯하다. 외청은 신선이 산다는 외계 삼청(三淸)을 말한다. 삼청은 인간이 바라는 도교의 최고 이상향이다. 외청을 나눴으니 모든 만물이 맑아져 석담파곡을 본 듯하다는 것이다.

황강을 율곡 이이의 석담, 우암 송시열의 파곶곡과 비겼다. 석담은 황해도 해주에 있으며 율곡 이이가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여기서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파곡은 송시열이 강학했던 곳이다.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화양구곡이라 했다.

권섭은 주자의 무이구곡,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을 본떠 성리학의 적통이 주자, 이이, 송시열에 이어 권상하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황강구곡」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송시열은 권상하의 삶과 학문의 전부였다. 스승이 살았을 때는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유배 길에 오를 때는 따라 나서거나 낙향해 은거했으며, 죽임을 당해서는 그 뜻을 죽을 때까지 좇았다.

권상하의 제자인 채지홍은 “도학은 우암 송시열 선생에서 한수재 권상하 선생에게로 전해지기에 이르렀고, 예악(禮樂)은 화양동에 이어 황강에 자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권상하의 학문적 지위와 사상적 권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황강이 조선 주자학의 성지임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곡(五曲)은 어드메오 이 어인 권(權)소ㅣ런고

일흠이 우연(偶然)한가 화옹(化翁)이 기다린가

이 중(中)의 좌우촌락(左右村落)의 살아 볼가하노라

오곡은 어디인가 여기가 권소인가. 이름이 우연인가 아니면 화옹을 기다렸던 곳인가. 이 중에 좌우촌락에 살아볼까 하노라. 노인은 권섭의 백부인 권상하를 말한다. 이 소의 이름이 우연히 권씨 자신의 성과 일치하니 조화옹 자신이 여기에 와 살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과 학문적 전통성을 지닌 여기 어디 가까운 좌우촌락에 살아볼까라고 하고 있다. 오곡의 이름이 권소임을 들어 이곳이 권상하의 은거지로 운명지어진 것임을 은연중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한시 3000여 수, 시조 75수, 가사 2편 등 다양하고도 많은 작품을 창작했으며 그 중 「황강구곡가」는 주자의 「무이도가」와 이이의 「고산구곡가」의 맥을 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